오랜 시간이 흘렀다. 한자리에 머물러 보낸 세월이 몇 세기를 지났다. 격동의 시대를 건너왔다. 평화와 대립, 분열과 화합의 순간도 생생히 지켜보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가마 타고 말 타며 오가는 이들부터 자전거와 오토바이, 자동차로 이동 수단이 진화해 가도 제자리를 지켰다. 거센 비바람 눈보라에도 부러지거나 꺾이지 않았다. 오롯이 홀로 서서 우직하게 살아왔다. 느티나무는 오늘도 우리 곁에 있다.
기쁨과 슬픔도 장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 덧없음을 알았다. 깃들어 사는 사람들은 백 년을 넘지 못했다. 느티나무는 여전히 건재하다.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들 앞에 숙연해진다. 모든 생명은 나름의 사명을 부여받았다. 존재의 가치와 의미는 말로 설명되는 게 아니다. 온몸으로 증명한다. 말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아 외면당하고 잊혀도 그뿐이다. 오늘도 말없이 서있는 이유다. 말이 없어 오히려 기대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들어주기만 해도 감사하다며 연신 손을 비비고 기도한다. 간절함을 이루어 줄 힘은 미약하나 들어줄 누군가에게 마음이 전달됨을 믿는 것이 기도이기에 모든 기도를 듣는다. 돋아난 뿌리 한편에 걸터앉아 털어놓는 푸념과 한탄도 받아 안는다. 느티나무에 주어진 고귀한 사명이고 의무다.
누군가의 아버지는 탁주 한 사발 들이켜고 주저앉아 한참을 울고 갔다. 그 아들은 쓴 소주를 들이부은 몸으로 내게 기대어 곤한 잠을 잤다. 객지로 떠난 자식들 보고픈 마음 달래는 곳도 느티나무 아래다. 이제나저제나 돌아오길 기다리는 어미의 마음은 나무 아래에서 멈춘다. 여기를 벗어나면 기다림의 간절함이 전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찾아들기 때문이다.
지금 살고 있는 마을 어귀에도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정확한 수령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어림잡아 300년이라는 추측이 정설이다. 그렇게 마을의 수호신이 되었다. 이른 아침 누가 맨 먼저 마을을 나서는지 알고 있다. 어딘가로 향하는 발걸음들이 너무 무겁지 않기를 염원한다. 재잘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줄어드는 마을을 바라보는 마음은 무겁다. 하나둘씩 사라져 가는 유한한 생명들의 고달픈 하루를 지켜보는 날들은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다. 늦가을 우수수 잎을 떨구면 사람들은 나무 아래 머무는 시간이 줄어든다. 겨울이 오면 모두가 서둘러 온기 가득한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래도 외롭지 않다. 겨울나기는 각자의 몫으로 버텨내는 삶의 무게였다. 봄이 오면 사방에 생기가 돌고 나무에도 무수한 새순이 돋아난다. 생동하는 삶의 현장을 함께 맞이한다. 여름이면 무성한 잎이 지치고 힘든 사람들의 그늘이 되고 쉼터가 된다. 반복된 세월을 헤아릴 수 없다.
불현듯 먼 조상의 삶과 후손들의 오늘이 겹쳐진다. 풍요 속에 웃음과 여유는 줄어들었다.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살갑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는 사람에 대한 온정도 차갑다. 걸어 지나치던 길을 차로 다니면서 더 삭막해졌다. 느티나무의 존재도 미약해져 갔다.
고향마을에도 거목의 느티나무가 있었다. 밖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 나무를 지나갔다. 어른 두 명이 팔을 벌려야 겨우 닿을 수 있는 둘레였다. 나무의 가운데는 세월의 풍파를 이겨낸 상처로 움푹 파여 있었다. 아이들은 그곳에 많은 것을 담아 두고 꺼내며 한 시절을 보냈다. 옆으로 길게 뻗은 굵은 가지엔 여러 명의 아이들이 걸터앉아 노래하고 발장구 치며 새들처럼 종알 됐다. 말잔등 위에 올라탄 기분도 누렸다. 나무 그늘 아래에는 어른들의 술 추렴과 장기판이 펼쳐졌다. 아낙네들은 손질할 나물들과 일거리를 가지고 나와 갖은 수다와 푸념으로 한낮의 시간을 가득 채웠다. 아이들은 공기놀이와 구슬치기, 딱지치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나무의 크기만큼 이웃 간의 정이 솟아나고 아이들도 무럭무럭 자라났다. 느티나무가 버티고 선 마을은 평온하고 너그러웠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낸 그 나무가 스무 해 전, 태풍으로 가지가 부러지고 질병으로 썩어 들어가더니 결국 고사했다. 공교롭게도 나무가 서 있던 바로 옆으로 고속철도 교각이 세워졌다.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과 소음에 서둘러 자리를 내주고 떠난 듯하다.
덩달아 마을의 인심도 사나워지고 이웃 간의 정도 메말라 갔다. 정겨운 풍경도 가뭇없이 사라졌다. 수호신이 사라진 마을은 그렇게 흔들리고 무너져 갔다.
사람들은 거목이 쓰러진 자리에 다시 나무를 심었다. 나무가 자라 듯 마을에 활기가 넘치고 인정이 샘솟길 소망하는 마음을 담았으리라.
길을 나서며 느티나무와 마주한다. 새삼 숙연해진다.
느티나무는 겸손과 나눔과 배려의 삶을 알려주었다. 느티나무는 모든 걸 내주고도 생색내지 않았다.
느티나무는 듣기만 하고 말하지 않았다. 아무 말하지 않고 더 많은 말을 하게 했다. 누구나 기댈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넓은 품과 마음을 가졌다.
오늘도 느티나무는 제자리에서 말없이 모든 걸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