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사라졌던 날
삼풍백화점 언덕을 오르기 전 400m 전,
교대역 사거리의 정지신호를 받고 차가 멈춰 섰습니다.
잘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공식 퇴근 시간이 4시였던 덕에, 이른 저녁 시간 영화를 보기로 한 부서의 목요일 문화의 날 행사를 위해 몇몇 동료들을 태우고 제 차는 신사역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음악이며 편한 대화에 바깥소리를 잘 들을 수 없었던 우리는 채 신호가 바뀌기 전 멀리 언덕을 가득 메운 회색 구름을 보게 됩니다.
차 안의 말소리가 잦아들고 상황 판단이 안 돼 어리둥절했지만 곧,
"주유소가 폭발했나 보다."
순간 당시 삼풍백화점 맞은편에 있던 주유소를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신호가 바뀌고 느릿한 차들이 언덕을 올랐고, 삼풍백화점 못미처 오른쪽 이면도로로 차를 멈춰선 우리는, 멀쩡한 것 같은 삼풍백화점 남쪽 벽면으로 다친 사람들이 나와 주차장에 눕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주유소가 아니라 백화점이었네."
그런데 함께 탄 선배가 갑자기 내지른 말에 정신이 번쩍 들게 됩니다.
"어 우리 아내 장보러 갈 시간인데."
당시 삼풍 단지는 아파트 상가의 역할을 백화점이 했던 터라, 주로 할인을 시작하는 늦은 오후의 식품 매장을 주부들이 주로 이용했었습니다.
다시 차에 타고 삼풍아파트로 들어가는 우리가 본 것은 멀쩡해 보였던 남쪽 벽면 이후로 뚝 끊긴 삼풍백화점과 바닥을 매운 콘크리트 덩어리 그리고 뒤집힌 차 등....
그제야 백화점이 거짓말처럼 무너져 내린 걸 알아차릴 수 있었고, 선배와 차에 타고 있던 일행 모두는 뭐라 말을 이을 수가 없었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을 그때의 광경이 도대체 어떤 참사였는지를 당시로써는 짐작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불과 교통신호 하나 차이로 사고 순간 그 옆을 지날 수도 있었다는 아찔한 생각도 나중에서야 알아차릴 정도였습니다.
선배 아파트에 도착해서 급히 엘리베이터를 타려 할 때에서야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사방에서 어지러이 들리기 시작했고, 함께 탄 장바구니 든 아주머니도 피가 묻은 옷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선배 집이 비어있었고 들어서자마자 미친 듯이 여기저기 전화를 눌러대는 선배는 잠시 불통이었던 전화가 다시 연결되고 20여 분이 지나서야 반포 친구네 집이라며 사정을 모르는 형수와 전화 연결이 될 수 있었습니다.
형수의 무사함을 확인하고 쿵덕거리는 가슴으로 단지의 반대편으로 차를 몰고 빠져나와 신사역 사거리의 지금은 없어진 그랑프리 극장에 약속된 시간을 훨씬 넘겨서야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극장엔 영화를 보던 사람들이 모두 로비에 나와 벽에 걸린 TV에서 숨넘어갈 듯 긴장된 아나운서의 속보로 전해지는 방금 우리가 빠져나왔던 삼풍백화점의 처참한 화면을 말도 없이 보고들 있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 날, 1995년 6월 29일 이후로 온 나라가 얼마 동안 패닉에 빠져 있게 되었고, 간간이 들려오는 생환자들의 소식과 희생자의 뒷이야기들이 한참이나 우울하게 모든 TV 전파를 차지하게 됩니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에 살 수 있다는 이야기처럼, 지금은 그 자리에 아크로비스타라는 주상 복합이 우뚝 서 있고 주민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도 떠올리기 싫어하지만 이따금 뉴스 한구석을 차지하기도 합니다. 저도 이제서야 죽음과 불과 몇 분, 거리로도 겨우 400m 앞에 있었던 기억들을 20여 년 만에 글로 남겨 보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뒤로도 잊을만하면 어이없이 반복되는 국가의 재난을 접할 때마다, 일상을 이어가는 우리가 모두 얼마다 위협에 근접해서 살아가고 있느냐는 생각을 해 보게 되고, 평범한 하루하루가 또 얼마나 큰 행복인가도 가끔은 곱씹어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