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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의 아픈 아빠 1

전화 트라우마

by 최굴굴

잠에서 아직 깨지 못한 이른 새벽,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낯선 듯 익숙하다.

‘데자뷔 인가.......’


어릴 적 우리 집엔 종종 이 시간에 전화가 오곤 했다.

밤새 누가 쓰러졌고, 지금 어떻게 해야 하냐는 다급한 목소리. 아침에 숨을 거둔 이를 발견했다는 말.

아빠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수화기 너머 사람들을 다독이며 집을 나섰고, 아주 가끔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어린 딸이 보기에 의사인 아빠 주변엔 온통 아픈 사람들뿐인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아빠 전화가 아닌 내 전화가 그 시간에 울린 것이다.


엄마였다.

“아빠가 간밤에 까만 변을 보셨어.”

엄마의 말끝에 불안함이 묻어났다.

흑변(Melena, 黑便)은 위, 식도 등 상부 위장관의 출혈을 암시하는 위험 신호다. 60대에서, 그것도 암 환자인 아빠에게서 이런 증상이 나타났다는 건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졌지만 일단 마음을 다잡았다. 엄마는 밤새 뜬눈으로 외래가 열리기만을 기다렸다고 했다. 아빠를 모시고 내시경을 받으러 가야 하니 조카 등원을 좀 도와달라는 부탁도 덧붙이셨다.


그렇다. 아빠는 암 환자다.

20대 파릇파릇한 외과병동 레지던트 시절 주삿바늘에 찔리는 사고가 있었는데 하필 B형 간염 환자의 혈액이 묻어있던 주사기였다. 의학 교과서에 나온 대로 병은 진행되었다. 아빠는 곧 B형 간염에 걸렸고, 20년 뒤 간암을 얻었다. 종양이 자리했던 간 일부를 떼어내고 다시 20년째 추적관찰 중이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눈곱도 떼지 않은 채 엄마 네로 뛰어갔다.

아빠는 벌써 운전대를 붙잡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서로 엇갈렸을 수 있었겠다 싶은 생각에 아찔했다.

“응, 아빠 괜찮아. 어서 들어가 봐.”

뭐가 괜찮다는 건지....... 놀랐을 딸을 안심시키려는 듯, 아빠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이 유난히 희게 보였다.



(다음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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