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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윤 Jul 05. 2019

빗물에서 허우적거렸던 마라톤

상쾌했어요.

 6시 30분, 핸드폰 알람 소리를 듣자마자 창밖을 내다봤다. 비가 안 내리길 바라며. 지난밤 잠들기 전에 확인한 '날씨' 창에는 비구름이 가득했다. 다행인지, 비가 내리고 있진 않았지만, 땅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고, 짙은 회색 구름은 하늘을 가득 덮고 있었다. 내 인생 첫 번째 10k 마라톤을 뛰는 날이었다.


 아식스 서울신문 마라톤을 두 달 전에 신청했다. 하지만 그동안 단 한 번도 마라톤을 위한 적극적인 준비를 하지 않았다. 러닝머신 위에서나 공원에서 달리려고 하지 않았다. 왜 안 달렸냐면, 조금이라도 먼 거리는 차 타고 가는 거에 길들여졌다. 그리고 요가하느라 달릴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 솔직히 뛰기 싫었다. 혼자서는.


 형광 노란색 반팔과 검은색 팔 토시, 노란 양말을 마라톤 3일 전에 택배로 받았다. 받은 후에도 러닝화 좀 신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보통 10K면 1시간이면 충분히 뛸 수 있다고 들었었다. 나는 1시간쯤이야 별거 아니라고 여겼다. 지난 나이키 러닝 5k를 상당히 거뜬하게 뛰었고, 평소 요가도 열심히 하니까. 이 정도의 자신감은 가질 수 있지. 아암. 기록 욕심은 없으니 완주만 하지 싶었다.


 차를 타고 서울 월드컵 경기장, 평화의 공원으로 향했다. 지하 주차장 밖으로 나오자, 비가 찔끔찔끔 내렸다. 경인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콸콸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마라톤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일단 갔다. 이미 낸 참가비가 오만 원이였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음악 소리와 하나! 둘! 셋! 넷 체조 소리가 빗속을 뚫고 울려 퍼지고 있었다. 평화의 공원은 이미 노란색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구령에 맞춰서 몸을 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홍보 부스에 사은품을 받기 위해 있는 줄도 길게 세워져 있었다.


 나는 함께 참가한 친구와 몸을 풀었다. 목, 어깨, 발목, 무릎을 돌리고, 누르며 준비 운동을 했다. 빗줄기는 점점 두껍고, 세차게 내렸다.


 하프 마라톤 참가자부터 출발하고, 5K가 그다음, 마지막이 10K였다. 우리 순서가 오기 전까지 홍보 부스 안에 들어가 비를 피했다. 비 맞으면서 어떻게 달리지, 맑은 날보다 더 힘들겠다, 미리 좀 달려볼 걸 그랬나, 그래도 완주는 해야지. 걱정이 컸다.   


 "10K 준비해주세요." 방송이 나왔다. 나와 친구는 참가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나갔다. 차가운 빗줄기가 몸에 닿았다. 화장실을 다녀온 지 10분도 되지 않았는데, 화장실이 또 가고 싶어 졌다.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참고 있었는데, 카운트 다운이 시작됐다. 요란한 폭죽 소리와 함성과 함께 다 같이 앞으로 나아갔다. 나도 떠밀려 갔다.


 나는 천천히 속도를 냈다. 머리카락과 옷이 더욱 젖어 갔다. 빗물이 눈 앞을 가려서 손으로 닦아 내야만 했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달릴 만했다. 언제 이렇게 비 맞으면서 뛰어볼까도 싶었다. 아무 날도 아닐 때 비 맞고 뛰고 있으면 가여워 보일 테니까.


 내 앞에 물웅덩이가 있었다. 신발을 안 담 그려고 피해 보려 했지만, 나는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어서 피할 곳이 없었다. 속력을 줄일 수도 없고. 그대로 물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신발이 풍덩 빠졌다. 빗 방물이 모여 이미 신발을 적시고 있었지만, 물 웅덩이 덕에 흠뻑 젖어버렸다. 그 후로는 웅덩이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달리는 거에만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2km도 달리지 않았을 때였다. 오른 발목과 왼쪽 다리의 바깥 무릎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안 뛰다가 뛰어서 내 다리가 놀란 듯했다. "뛸만해? 괜찮아?" 내 안위를 묻는 친구에게 "응, 괜찮아."라고 답했다. 아픔을 말로 뱉는 순간 내 아픔이 더 선명해질까 봐 목 뒤로 넘겨버렸다.


 평화의 공원에 들어섰다. 짙은 초록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와! 여기 진짜 예쁘다." 아직 풍경을 즐길 만했다.

 

 "힘들면 말해." "안 쉬어도 돼?" 친구는 계속 나를 챙겨줬다. 나는 힘들었다. 다리도 아프고, 비도 성가시고 조금 걸어 볼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한번 멈추면, 영영 뛰기 싫어질 거 같았다. "괜찮아." 나는 말했다. "오! 페이스 좋아! 잘 뛴다!" 친구의 칭찬과 격려가 나를 더욱 멈출 수 없게 했다.  


 7km를 지나니 양옆에 나무가 쫙 심어진 흙길이 나왔다. 흙은 이미 물에 불어서 질척거렸다. 발을 잡고 놔주질 않았다. 길의 가운데는 수많은 러너들의 발자국으로 패어서 자국 자국 물이 고여있었다. 행여나 진흙에 빠지거나 미끄러질까 봐 발자국이 덜 있는 가장자리에서, 최대한 나무 쪽으로 붙어서 뛰려고 했다. 온 다리에 힘을 주고, 달려야 했다. 눈앞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땀인가, 빗물인가.  


 무릎부터 사타구니로 이어지는 내전근이 당겨왔다. 엉덩이도 찌릿찌릿했다. 중심을 잃어 삐끗하거나 넘어지지 않도록, 엄지발가락, 새끼발가락, 왼 뒤꿈치, 오른 뒤꿈치가 골고루 땅에 잘 닿도록 신경 썼다. 요가에서 이렇게 발 사면을 바닥을 딱 지지하고 있어야 몸의 중심이 잘 잡힌다는 것을 배웠던 것이 떠올랐었다.


 무사히 진흙 길에서 벗어나니, 9km 지점이었다. 다 왔다! 조금만 더 가자! 했는데. 오르막길이 있었다. 뭐랄까. 오르막길이 팔짱 딱 끼고 내가 그렇게 만만할 줄 알았어? 라며 눈을 내리깔고 나를 쳐다보는 거 같았다. 진흙탕에 미끄러질까 봐 온 신경을 쓰고 달려서, 다리 힘을 조금이라도 빼고 싶었는데, 다시 온 힘을 줘서 올라가야만 했다. 하. 정말.


 친구는 내가 힘든 것을 알았는지, 내 등을 밀어줬다.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친구의 손 힘을 받아서 올라갈 수 있었다. 오르막길이 끝나니 함성이 들렸다. "힘내세요! 피니쉬  라인입니다!" 나는 분명 힘이 다 빠졌던 거 같은데, 어디에선가 힘이 올라 솟아났다. 속도를 더 했다. 마지막 힘을 쥐어 짜냈다. 기록에 신경 안 쓰기로 했는데, 어차피 다 왔으니 남은 힘을 마지막 500m에 털어내야겠다 싶었다. 마지막 커브를 꺾으니 피니쉬 라인이 보였다. 다리가 거의 반자동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네가 먼저 들어가!" 친구가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조금이라도 기록이 빨리 나와야 하니 더 빨리 달렸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정말 기뻐서 위아래 치아 다 보이게 웃으면서 피니쉬 라인을 통과했다. "우리 완주했어! 나 너무 행복해! 고마워! 같이 마라톤 뛰어줘서!"   


 비의 무게를 견디며 달렸다. 아니 어쩌면 비 덕분에 몸과 햇빛이 뿜어 대는 열기를 견딜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친구의 격려와 관중들의 함성 덕분에 나는 첫 10km 마라톤을 01:02:40.05으로 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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