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예술가 G, 36세
연말연시가 되면 나의 왼손 새끼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은 바빠진다. Ctrl C, Ctrl V를 누르는 일이 많아지는 공모 시즌이기 때문이다. 2020년, 나이 서른여섯이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취업준비생이다.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이후로 지금까지 이 상태를 벗어난 적이 없는 불안한 직업을 가진 나는, 예술가이다.
예술가라는 직업을 방송 매체에서만 본 사람이라면 꽤 멋있고 쿨한 직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직업이 그렇듯, 그 속에서 치열하게 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안다. 이 직업만큼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처절한 직업이 없다는 것을. ‘예술가’, 특히 순수 미술을 하는 나는 사회에서 ‘화가’, 혹은 ‘작가’라 칭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보통 화가‘선생님’, 작가‘선생님’이라는 조금은 불편한 호칭으로 나를 부른다. 선생님이라는 호칭 외엔 다른 것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쓸데없이 가방끈이 길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나뿐만 아니라 미술계에서 활동하는 많은 예술가들은 석사는 물론이고, 유학파에, 박사 학위까지 받은 사람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이렇게 어렵게 오래 공부한 이들 대부분도 예외 없이 매년 취업준비생이 된다. 이런 난감한 상태의 사람을 지칭했던 명대사가 문득 떠오른다.
“고학력 빙신”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 tvN 방영)의 실패한 영화감독, 셋째 아들 박기훈(송새벽)을 두고 그의 엄마(고두심)가 한 말이다. 나이 서른이 훌쩍 넘은 아들이 삼시 세끼 집에서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뒹굴고 있으니 더 심한 말이 안 나온 게 다행이다 싶었다. 우리 엄마의 심정도 저럴까 싶기도 해서 이 호칭을 들었을 때, 괜히 뜨끔하며 옆 사람의 눈치를 봤던 기억이 난다.
예술계에는 이처럼 “고학력 빙신”들이 넘쳐난다. 주식에 비유하자면, 나와 같은 고학력 빙신 개미들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한방을 바라보며 열정을 앞세워 힘들게 버티고 있지만, 대부분의 기회는 실력과 운을 함께 타고난 대주주와 같은 고학력 여우들이 판을 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고학력 빙신들이나, 고학력 여우들 할 것 없이 연말연시에 그들의 손가락이 바쁜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자유로워 보일지 모르는 프리랜서의 생활 패턴을 갖고 있지만 어쩌면 휴일 없이 매일 일하는 직업을 가진 자들이 바로, 예술가다.
본업인 예술을 하기 위해 그들은 또 다른 직업들을 가져야 한다. 학원이나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벽화, 카페, 택배 알바 등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가리지 않고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창작을 하기 위한 자금이 마련되므로. 나 역시 언제 관둘지 모르는 본업인 예술가라는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학생들을 가르친다. 경제활동을 통해 번 돈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다. 통장에 뿌듯한 숫자가 박히기가 무섭게 생활비와 창작을 위해 쓰인 카드 값으로 쉴 틈 없이 빠져나간다. 이 빠듯한 생활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이 연말연시에 몰려 있는 각종 단체의 지원금 사냥이다. 작게는 백 단위에서 크게는 천 단위까지 창작활동을 위한 지원금을 다양한 예술가에게 하사해 주신다. 그리고 그것을 받기 위해 나를 포함한 동료들은 키보드 워리어가 되어 영혼을 갈아 넣은 소설급 기획을 해야 한다.
물리적으로 창작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도 뼈를 깎는 고통인데, 그것을 위한 기획서 창작까지. 내 몸과 머리가 세 개쯤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루에 몇 번이고 한다. 가수 서태지가 서태지와 아이들로 절정의 인기에 올랐을 때, 창작의 고통을 호소하며 은퇴한 마음이 백번 이해가 된다.
그런데도, 나는 나의 직업을 사랑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이 불안한 직업을 포기하고 돌아설 만한 극적인 상황이 연출되지 않아서 현재까지 ‘대박’은 아니지만, 근근이 ‘소소소박’ 정도는 치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시간을 조금은 자유롭게 쓸 수 있어서 평일에 언제든 떠날 수 있고, 그 시간에 스스로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평생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다. 물론, 누군가가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순진무구하고도 철없는 소리를 하면, 도시락 들고 따라다니며 말릴 테지만.
무릎 나온 추리닝 바지, 유니클로 후리스와 같은 기능이 탁월한 옷을 입고 전장에 나서는 군인의 마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는다. 가볍게 목과 어깨 스트레칭을 한 후, 창작 농사를 위해 내 머릿속에서 나올 수 있는 최대치의 아이디어 씨앗을 수면 위로 올린다. 그리고 왼손 새끼손가락과 검지를 사용해 거침없이 여러 개의 논밭에 씨앗을 뿌린다. 손과 머리가 늘 바쁘고 불안한, 매년 취준생인 나는, 예술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