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 뒤에 바람이 차다. 춥다는 말이 절로 나오고 괜히 어깨가 움츠려 든다. 전례 없는 더위로 더워서 쩔쩔 했는데 여름이 갔다. 텃밭의 채소들은 성장을 멈추었는지 자라지 않는다. 고추와 오이와 깻잎 덕에 여름 내내 식탁이 풍성했는데 이제는 썰렁한 이파리만 남아 있다. 아직도 꽃이 매달려 있지만 이대로 춥다가는 더 이상의 작물은 기대할 수 없다. 여름 내내 하나도 내주지 않던 호박이 아쉬웠는지 마지막 꽃 한 송이를 피워내며 떠날 준비를 한다.
모종을 얻어서 애지중지 키운 모종이 그만큼 내주었으면 되지 더 이상을 원하면 욕심이다. 여름 내내 물만 주었는데 잘 자라주어 고마울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물을 주고, 뜨거운 낮에 너무 더워서 탈것 같으면 한번 더 준다. 저녁이 되어도 내려가지 않는 폭염날씨에 밤새 안녕하라고 물을 주면 아침에는 몰라보게 쑥쑥 자라 보답하는 작물들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말로 할 수 없다. 구경꾼인 나는 남편이 물 주는 것을 구경하며 옆에서 감탄을 한다.
아무도 모르게 이파리뒤에서 자란 커다란 오이를 따서 먹는 맛이란 꿀맛은 비교도 안된다. 오이를 좋아하는 손주들이 여름 내내 따먹고, 오이소박이와 오이지를 담아 나름대로 고향의 맛을 본 여름이다. 조그마한 씨하나가 모종으로 태어나 밭에 심어 자라나는 모습에는 위대한 생명의 신비가 있다. 돈으로 계산하면 얼마 되지 않는 작물이지만 지나칠 때마다 들여다보고 정성을 들이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잘 자라주는 작물이 더운 여름을 이겨내게 한 것 같다.
간사한 게 사람이라고 더위가 물러가기를 고대한 가을이 오니 벌써부터 여름이 기다려진다. 시원한 그늘을 찾아다니며 더운 날씨가 원망스럽던 날도 지나고 나니 추억이 된다. 더위가 없으면 작물의 성장도 없다. 뜨거운 태양이 생명을 자라게 하고 바람과 비가 오고 가며 열매를 맺게 한다. 지난 주말에 교외에 사는 친구네 집을 방문하러 가는 길에 본 들판에는 밀과 유채가 황금물결 같이 바람결에 춤을 추고 추수한 곳도 많이 보였다.
친구네 텃밭에는 온갖 작물들이 가을 걷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참으로 정겹다. 손 큰 친구가 정성 들여 기른 호박과 쑥갓과 마늘을 비롯하여 온갖 채소들을 커다란 가방에 싸 준다.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으로 가져다 잘 먹는다. 가게를 하면서도 어찌 그리 농사도 잘 지었는지 팔뚝만 한 호박을 보며 깜짝 놀랐다. 토마토나무에 새빨간 토마토가 달랑달랑 매달려 익어간다. 1월에 토마토를 사서 씨를 심었는데 그렇게 잘 자란다고 한다. 쑥갓과 부추와 아욱과 근대를 틈틈이 가져다주어 고맙게 잘 먹기는 해도 미안한 마음이다.
이제는 누가 뭐라 해도 가을이다. 폭염으로 고생하더니 폭우 때문에 난리가 난 고국의 소식을 들으며 비가 멈추기를 기다려본다. 자연으로 인한 피해는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해지고 있다. 인간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자연재해로 세계 곳곳에서 고통을 당하고,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곳곳에서 끊이지 않는 현실이다. 평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평화를 위한 전쟁을 하는 인간의 무지에 마음이 아프다. 무모한 서민들의 아픔은 누가 보상해 줄지 생각하면 막연하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와도 그들의 땅따먹기는 끝이 나지 않고 있다. 전쟁 없는 세상은 역사상 한 번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싸우고 뺏고 빼앗기고 죽고 죽이며, 복수하고 미워하며 원망하는 세월 속에 살아간다. 가을이 아름답게 익어가듯 사람들의 마음도 평화가 찾아오기를 바란다. 뒤뜰을 걸으며 지난 한 해를 돌아본다. 아무것도 할 일 없는 백수인데 왜 그리 바쁜지 모른다. 매일매일 정신없이 살다 보니 올해도 몇 달 남지 않았다.
가을걷이도 해야 하고 겨울 준비도 해야 하는데 귀찮아진다. 하루하루 미루다가 급해지면 하려는지 게으름을 피운다. 단풍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모르다 보면 바람이 불어 떨어지는 낙엽이 보이면 그제야 정신이 들어 겨울이 다가오는 것을 알게 된다. 조금씩 물들어 가는 나뭇잎처럼 나도 어서 철이 들어야 하는데 마음은 아직 젊어서 인지 가을구경만 하고 싶다. 마가목은 빨갛게 익어서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토마토도 마지막 힘을 내어 빨갛게 익어간다. 사과는 아무래도 서리가 내려야 익을 것 같으니 기다리면 된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이 하나둘 따라 담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 많은 까치는 어디로 갔는지 오늘 하루종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토끼 한 마리가 앞뜰에 앉아서 졸고 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평화로운 오후에 나도 몰래 뒷짐을 지고 이리저리 뜰을 기웃거리며 늙은이 행세를 한다. 가을 따라 늙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앞뜰에 있는 소나무가 단풍이 들어 누런 솔잎을 뚝뚝 떨어뜨리며 서 있다. 세상을 따라 산다는 것은 계절에 순응하며 기다려야 하는 것을 배운다. 세월을 끌어안고 순응하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