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심하게 불더니 이내 눈보라가 친다. 가을은 가기 싫어하고 겨울은 오고 싶어 한다. 계절의 순환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지만 유난히 추위를 잘 타는 나는 겨울을 정말 피하고 싶다. 아직 10월 중순 이건만 날씨는 겨울 날씨다. 마루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니 뜰에 있는 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무도 사람처럼 나이 들어 늙어 가는 모습이 여러 가지다. 구부러져 쓰러진 채 서 있는 나무도 있고 한쪽에 병이 들어 벌겋게 색이 바랜 나무도 있다. 집이 오래되어 나무들도 다 나이가 들었다. 우리 집을 감싸 안고 서 있는 등 굽은 소나무가 군데군데 단풍이 들었고, 그 옆에 있는 굵은 백양나무도 누렇게 퇴색한 나뭇잎 몇 개를 달고 쓸쓸히 눈을 맞고 있다. 맞은편에 반쯤 병든 전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고, 그 옆에는 이름 모를 나무가 단풍도 들지 않은 채 새파란 잎으로 겨울을 맞고 있다.
지하실 창문 앞에는 해마다 예쁜 꽃으로 앞뜰을 장식해 주는 해당화 나무와 작약이 추운 듯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고, 마루 쪽 화단에는 달맞이꽃 나무가 서리를 맞고 꽁꽁 얼어붙어 있다. 옆문으로 가는 길 옆에는 개나리 나무가 누렇게 단풍을 품은 채 죽은 듯이 서 있다. 지난여름에 대녀가 개나리 나무를 뿌리째 가져와서 심어 주었다. 그 후 몇 주 지나지 않아 갑자기 그녀가 뇌출혈로 생사를 넘나들며 한동안 병원에 입원해 누워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지만 물에 빠진 사람이 풀포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개나리 나무 가지를 붙잡고 혼잣말로 "내가 너 잘 키워 줄 테니 제발 살려 달라."며 눈물로 하소연을 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 었기에 나뭇가지라도 매달려 보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옆문을 열고 들어가면 봄마다 보라색 꽃으로 향기를 자랑하는 라일락 나무가 있고, 남쪽 벽에는 장미 정원이다. 몇 년 전에 작은 장미 화분 몇 개를 사다 심었는데 그 추운 겨울에도 잘 견디며 무성하게 잘 자란다. 해마다 초봄에 한 번씩 가지치기를 해 준 것 밖에 없는데도 기특하게 여름부터 늦가을까지 꽃이 핀다. 빨간 장미는 옆 뜰을 늘 화려하게 만들어 주고, 때로는 몇 송이의 모습으로 화병에 꽂힌다.
그 옆으로는 사과나무 두 그루와 체리나무가 서 있다. 근 15년 전에 사과나무 한 그루와 체리나무 한 그루를 사다가 심었는데 사과나무는 잘 자라고 있는데 이상하게 체리 나무는 병이 들었다. 이파리에 진딧물이 다닥다닥 새까맣게 붙어 있고 열매도 맺지 못하지만 살아 있는 나무를 차마 잘라 버릴 수 없어 그냥 놔두었는데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 같다. 올해는 봄이 늦게 왔고 여름 또한 추웠는데 가을이 짧고 겨울이 빨리 와서 그런지 사과도 체리도 시원치 않았다. 해마다 사과를 몇 박스씩 따서 이웃들과 나누어 먹고 파이도 만들고 냉동고에 얼려서 겨울에 아이스크림하고 먹곤 했는데 올해는 겨우 한 상자 밖에 못 땄다. 옆집과 뒷집에 한 봉투씩 주고 나니 그만 이었다.
그 옆으로는 마가목 나무가 빨간 열매를 매달고 조금 전부터 내린 눈으로 하얀 모자를 쓰고 멋진 포즈를 재고 서 있고, 그 옆에는 밥풀꽃 나무가 이파리를 다 떨어 뜨린 채 앙상한 모습으로 쓸쓸히 서 있다. 아까부터 내리던 눈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앞 뒤뜰을 하얗게 덮었다. 2월이나 3월에 오는 눈은 해가 길어 금방 녹아 버리는데 10월에 오는 눈은 쉽게 녹지 않는다. 어릴 적 첫눈이 오면 이유 없이 좋아했지만 이제는 가을을 제치고 무댓보로 쳐들어오는 겨울이 싫다. 차고 뒤쪽에는 옮겨다 놓은 몇 그루의 앵두나무와 딸기나무들이 눈을 맞으며 청승맞게 서 있고, 부엌으로 들어오는 문 옆에 있는 앵두나무는 며칠 전 영하로 떨어지는 온도로 이파리가 꽁꽁 얼어 버렸다. 봄에 꽃샘바람으로 만개했던 꽃이 얼어서 앵두를 하나도 못 따먹었는데 가을에 이파리까지 얼으니 말 못 하는 식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갑자기 찾아온 겨울은 자리를 잡고 눌러앉을 모양이다. 뜰에 떨어진 낙엽도 긁고 해마다 피는 다년생 꽃도 대충 다듬어 주어야 한다. 겨울이 오기 전에 가을이 남기고 간 가을을 주우며 겨울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못한 채 겨울을 맞이해야 한다. 날씨가 추워도 새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뭇가지에 앉아 재잘대느라 난리이다. 기러기들은 남쪽으로 떼를 지어 날아갔고 이곳에서 겨울을 나는 참새들만 바쁘게 짹짹댄다. 주먹만 한 작은 새들도 잘 견디며 겨울 준비를 하는데 나는 따뜻한 집안에서 날씨 운운하며 투정을 부린다.
우리가 이 집에 산 세월이 어언 30년이 되니 나무도 늙고 사람도 늙는다. 세월 따라 없던 꽃도 피고 있던 나무도 없어진다. 몇 년 전 전나무 하나가 죽어 베어 버린 자리에 개나리 나무가 들어왔고, 지난봄에는 어디서 날아온 개망초 씨가 자리를 잡아 예쁜 하얀 꽃을 피워 앞마당이 훤했었다. 아이들이 있을 때는 집 안팎이 시끌시끌했는데 지금은 절 집처럼 조용하다. 철 이른 눈을 바라보며 지난 세월을 생각하니 여러 가지로 감회가 새롭다. 세월이 참으로 빠르게 갔다. 며칠 뒤에 어느 정도 눈이 녹으면 서서히 겨울 준비나 시작해야겠다. 아직은 10월 중순이고 어쩌면 우리에게 "인디언 서머"가 청명한 가을 날씨를 가져다 줄지 모르니까 섣부른 걱정은 하지 말고 겨울이 온다고 피하려 하지 말자. 오는 겨울을 차분히 맞이하는 자연처럼 싫으나 좋으나 오는 겨울을 껴안아 보자. 그러다 보면 겨울 안에서도 나만의 따스한 봄을 만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