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이 봄을 기다리다 날씨가 좋아 봄인 줄 착각하고 산보를 나왔나 보다. 여기저기 새들이 날아다니고 지저귀는 새소리가 한겨울에도 봄을 느끼게 한다. 그들은 어디에 살까? 어디에서 추위를 피하며 겨울을 날까? 걱정 없는 그들도 겨울이 무서울까? 여름에 숲을 돌아다니며 겨울에 살집을 봐놓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자문자답한다. 철새들은 남쪽으로 겨울을 보내러 떠나가지만 참새나 까치 까마귀는 이곳을 지킨다. 혹독하게 추운 겨울을 이곳에서 나기가 힘들어도 마땅히 갈 데가 없으면 이곳이 나을 것이다. 오래전 이곳에 대공황이 왔을 때 생존하기 위해 큰 도시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갈 수도 없고, 가도 마찬가지 일 것 같아 이곳을 떠나지 않고 살았던 날들이 생각난다.
1980년도 4월에 이곳으로 이민을 왔다. 언어도 풍습도 다른 이곳에서 직업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한 달 두 달 살며 성당에 나가며 교우들을 사귀고 나름 적응하기 시작했지만 기술이 없는 상황에 일자리는 남들이 하지 않는 청소나 알바 정도밖에 없었다. 연년생 아기가 둘 있던 나는 꼼짝할 수 없었고 남편이 찾을 수 있는 직업은 한정되어 있었다. 1982년에 대공황을 맞은 이곳은 폭격 맞은 전쟁터처럼 황량한 모습으로 모든 공장들은 굳게 문이 닫혀있었고 많은 사람들은 다른 주로 이사를 갔다. 그야말로 갑자기 우리의 인생에 겨울이 닥쳐온 것이다. 남들은 큰 도시로 떠나기 시작했다. 누나가 사는 곳으로 친척 형이 사는 곳으로 하나둘 떠나 가는데 우리는 갈 데도 없고 오라는 사람도 없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힘들기는 어딜 가도 마찬가지다.
어린것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간신히 사람들 알아가며 자리 잡아 가는데 또 다른 곳으로 가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같이 가보자는 사람도 있었지만 셋째를 날 달이 다가오는데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몇 안 되는 아는 사람들이 떠나고 경제는 풀리지 않아 공장을 돌아다니며 일을 찾아보았지만 매번 헛걸음만 할 뿐이다. 대 공황이 오기 전 해만 해도 공장에 일이 너무 많아 밤낮으로 일을 했는데 갑자기 찾아온 불경기는 세상을 그대로 멈추게 했다. 그래도 먹고살아야 하기에 뭐라도 해야 했다. 마침 그때 대형 몰이 생겼는데 연줄연줄 아는 사람 통해서 남편이 간신히 밤에 청소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자동 청소기가 아니고 몸으로 기계를 밀고 다니며 쇼핑센터 바닥을 청소하는 것이다. 생전 험한 일을 해보지 않던 남편은 몸으로 버티다 보니 허리가 비틀어져 오랫동안 침을 맞으며 고생했는데그때 침을 놔준 자매님이 지금까지도 고맙다.
잘 살아 보려고 외국에 왔는데 현실은 냉정했다. 이곳을 떠난 사람들도 고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캐나다 동부로 간 사람들은 새벽에 지렁이를 잡는 일을 하며 먹고살아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남의 나라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현지인들이 하지 않는 일들 뿐이다. 그때의 설움이야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아무런 정보도 없이 와서 먹고살기 위해 농장에서 뼈가 빠지게 일을 한 사람도 있고 최저 임금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며 아침 꼭두새벽부터 밤중까지 일한 사람도 있다. 그때는 인터넷은 고사하고 신문도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동네에서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이 신문을 읽고 모아두면 금쪽같은 고국 소식을 알고 싶어 구문이 된 신문을 돌아가며 읽으며 고국 소식을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삶인데 그렇게 사는 것인 줄 알고 살았다.
살아가면서 기술도 배우고 자격증도 따며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까지는 정말 피눈물 나는 삶이었다. 아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나름대로 일찍 적응했지만 우리처럼 단독 이민을 온 사람들은 혼자서 모든 것을 해야 했기 때문에 고생이 말도 아니었다. 상상할 수 없는 삶을 살면서도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참고 서서히 적응하며 살았다. 한국을 떠나온 지 8년 만에 한국에 갔다. 88년 올림픽을 준비하는 한국은 내가 없는 사이에 몰라보게 발전했다. 사람들은 가난의 모습을 벗고 으리으리한 집에서 편안하게 잘 살고 있었다. 우리가 캐나다로 이민 간다고 할 때 공항에 오신 부모 형제들이 다시는 살아생전 만나지 못할 거라며 눈물로 이별을 했는데 8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국의 모습은 눈부시게 달라져 있었다. 선진국이라는 캐나다에 살다 간 우리가 오히려 촌스럽게 보였다.
세월이 흘러 가난에 시달리던 한국은 세계 정상을 향해 달려왔던 것이다. 1달간의 휴가를 마치고 캐나다를 향해 가는 발길은 무거웠다. 8년 동안 사람들이 저렇게 잘 먹고 잘 사는데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들 셋 낳아 기른 것 밖에 없었다. 여전히 영어도 못하고 집도 없고 직업도 없이 세월만 까먹고 살았다. 남들은 둘이 벌어서 집도 사고 여행 다니며 잘 사는데 나만 뒤떨어져 살고 있었다. 그때 큰애가 8살, 둘째가 7살, 셋째가 6살이 되었으니 학교를 보내고 나도 영어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키우며 학교를 다니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열심히 영어를 배우고 직업을 갖게 되었다. 빵집에도 다니고 쇼핑센터에서 일도 하고 조금씩 영어가 익숙해지며 컴퓨터 회사와 병원에서 정직원으로 일을 하다가 사업을 시작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사회생활이지만 정년에 퇴직을 한 사람 중에 하나가 되어 산다.
여러 가지로 어려웠던 날들을 보내고 지금의 나로 산다. 오늘의 나를 그려보지 않았지만 지금의 내가 좋다. 추억의 강을 따라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면 지나간 세월이 꿈만 같다. 앞이 보이지 않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던 날들을 살아온 것이 기적이다. 넘어질 듯 금방 쓰러질 것 같아도 애들하고 먹고살 생각만 하고 살다 보니 오늘까지 왔다. 특별히 원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없이 건강하기만을 바라며 사는 나이가 되었다.
겨울이 되어도 가지 않고 이곳을 지키는 참새나 까치처럼 이곳을 지키며 살아온 세월이 간다. 남들이 큰 도시로 가자고 했을 때 갔으면 어땠을까는 영원히 답을 모른다. 삶은 선택이고 선택한 곳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