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축구 Jun 26. 2024

광야에 서다.

텅 비고 넓은 들.

광야에는 '길'이 없다. 내 발길이 닿는 곳이 곧 길이다. 길을 걷다 길이 없어지니 당혹스러웠다. 교사생활은 어느 방향으로 얼마만큼 가야 하는지 명확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어디로 얼마만큼 가야 하는지 말해주는 표지판도 사람도 없었다. 외로웠고 괴로웠다.


집 근처 커피숍으로 책을 들고나갔다. 반 백수인 나에게 어차피 중요한 연락은 올 곳이 없으니 핸드폰을 집에 놓고 나왔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핸드폰을 놓고 나서니 비로소 속 시끄러운 소리가 잦아들었고 고요해졌다. 마음이 한결 편해져 책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앙상했던 나무에도 어린잎이 제법 다 자라났다. 봄이 왔다.

'내가 이렇게 괴로워하면 문제가 해결되나?'


누군가 심각한 표정하고 있으면 내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야 고민한다고 고민이 해결되면 그게 고민이냐? 고민하지 말어~" 이렇게 말을 해주면 대다수는 그 말에 작은 위안을 얻는 표정이라 꽤나 자주 쓴다. 근데 나 스스로에게는 못해줬던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말해줬다. "고민한다고 해결될 거 아니면, 고민 그만하고 그냥 사람 만나고 다니면서 놀자"


그때부터 여기저기 사람을 만나고 다녔다. 평소에 보기 힘들었던 사람들도 나의 '반 백수'신분을 십분 활용해 상대방에게 장소와 시간을 맞추고 찾아갔다. 내가 헛살지 않았던가, 아니면 그들이 천사와 가까운 사람이던가 둘 중 하나인데 그들은 흔쾌히 밥과 술을 샀고, 더불어 내 한탄에 가까운 고민까지 진지하게 들어줬다. 마음을 내려놓으니 귀가 열렸고 그들의 조언을 귀담아듣기 시작했다. 


전화가 한통 왔다. 친한 형이자 동지 창혁이 형이었다.

창혁이 형 집에서 진행한 '이창혁의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내가 지금 한 책을 읽고 있는데, 하고 싶은 세션이 있어. 너의 도움이 필요해"


난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도움 받은 것도 참 많은 형이라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이런 스케줄이 생긴다는 것은 '반 백수'에게 크나큰 기쁨이었다. 4시간가량을 진행한 세션에서 창혁이 형은 자신의 'Why'를 찾아냈다. 그 세션을 진행하면서 나도 나의 'Why'를 찾고 싶었다. 창혁이 형은 언제든 자신에게 부탁해도 된다고 했지만, 내 이야기를 좀 더 모르는 사람이 낫겠다 싶었다.(내담자를 고르는 조건에 내 이야기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보다 덜 아는 사람이 좋다고 되어 있었다.) 그래서 기본학교 2기의 함민규를 떠올렸다. 친해진 지 얼마 안 되어 내 인생의 이야기를 전부는 모르지만, 핵심을 짚어내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

삼전동 아르헨티나에서 진행된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세션

함민규는 바쁜 와중에도 자기 일처럼 달려와 내 세션을 도와주었다. 내가 창혁이 형의 세션을 제대로 도운 것 맞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지하고 또 경쾌하게 세션을 풀어나갔다. 준비한 A4용지 20장 이상을 써 내려가며, 나의 Why를 찾는데 힘써주었다. 그리고 끝내 마지막 퍼즐이 들어맞는 듯한 쾌감이 찾아왔다. 함민규는 복잡했던 나의 과거 행동들과 감정들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 내었다. 그 문장을 처음 써내려 갔을 때의 쾌감은 지금도 짜릿하다. 내가 살아왔던 이유,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이유가 한 문장으로 정리되었다. 


"나는 사람들의 순수했던 시절의 꿈을 상기시켜, 

그들의 단 한 번뿐인 인생을 후회 없게, 낭만 있게 하겠다."


이 문장이 정리되자. 마치 나의 더럽고 복잡했던 뇌를 세탁기에 넣고 돌린 것 같이 시원하고 맑아졌다.

이전 11화 그렇다면 이제 난 무얼 해야 하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