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만 먹고 아름다운 여인이 되는 웅녀. 아이들에게 단군신화를 읽어주다가 순간 욱 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아이들에게(특히, 딸들에게) 여자는 인내 속에서 태어난다고 가르치는 것 같아서였다.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한 인내라고 본다면 남녀 구분해서 보는 시선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엄마로서의 나의 삶을 바라보자니 뼛속까지 스며든 인내의 태도가 어려서부터 학습되어 온 것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는
형체 없는 엄마라는 사람
아이보다 먼저 지치지 않고, 아이보다 많이 알아야 하는, 엄마는 힘들어도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부턴가 그 기준에서 조금만 비켜 나가도 마음이 버거워지고, 해내지 못하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걸 깨달았다.
모두가 공통적으로 떠올리는 엄마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 나타날 가능성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엄마가 되어도 나는 나이고, 엄마가 된다고 해서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하진 않는다.
나는 내가 실수할 수 있고,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인정한 순간부터 아이들을 대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실수하면 고치면 되고, 잘못하면 사과하면 된다. 다만 육아의 바탕에 올바른 방향성과 올곧은 인간성을 토대로 한다는 원칙은 변함없다.
첫째 아이가 11개월쯤 되었을 때 이야기이다. 나는 아기띠를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집 앞에 있는 수녀원에 갔다. 수녀님께서 엄마야말로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는 사람이라며 아기 키우느라 몸은 힘들겠지만 꼭 나오라고 하셔서 가게 되었다. 나가게 된 자리에는 50대 여자분도 함께 계셨다. 어떻게 지내는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자분께서 갑자기 눈물을 흘리시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초면인 나는 마치 투명인간인 것처럼, 자신의 감정이 넘쳐흘러서 어디라도 상관없으니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간절함으로 입을 여셨다.
저는 우리집에서
‘쓰레기통’ 같아요.
본인 입으로 자신을 ‘쓰레기통’이라고 말하시는데, 그 단어를 듣자마자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았다. 당시 감정에 치우쳐 그런 표현을 하신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남편도 자식도 자신을 본체만체 데면데면하고, 다들 바깥으로 제 일을 보러 나가 집에 홀로 있는 시간이 많다고 하셨다. 가족들에게 건네는 말들은 하나같이 화풀이나 짜증으로 돌아오는데, 그게 집에서 당연시 여겨질 뿐만 아니라 본인도 이 모든 걸 담아내고만 있어서 가슴이 답답해 터져 버릴 것 같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로서 무엇이든 처음이었던 그때, ‘쓰레기통’이라는 단어를 들었던 그날, 나는 내가 생각하는 ‘인내’가 조금 달라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 안의 나를 묵인하는 행동’, 그것은 인내의 범위에 들어가면 안 되는 것이었다. 엄마로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해내야 하는 일’. 이 차이에는 ‘내’가 주인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웅녀가 된 곰 말고, 뛰쳐나간 호랑이에겐 관심이 없다. 끝까지 참지도 못한 호랑이는 어리석다고만 했다. 그렇지만 그 뒷이야기는 누가 알까. 호랑이는 자신이 한 선택에 만족하며 즐기는 삶을 살고 있을지.
우리 아이들은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선택의 선상에서 때로는 곰이 되고 때로는 호랑이도 될 것이다. 나에겐 아이들이 자신의 선택에 얼마나 만족하며 사는지가 더 중요하다. 후회야 어떤 선택이든 늘 따라오는 것이니 자신의 신의(信義) 잃지 않고 살았으면 한다. 자신을 속이고, 남들이 평가하는 잣대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무엇이 되고자 함에 있어서 간절함과 행동력의 박자가 맞아야 한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스스로를 응원해줄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각자만의 색깔로 ‘나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아이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이다.
스스로 기준을 만드는 일에 지지해주고 싶다. 그리고 아이들의 선택을 존중하며 앞에서 끌어주기보다 뒤에서 밀어주는 엄마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