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잠자리(조용필3집/30주년베스트앨범)
아마 나는 아직은 어린가봐 그런가봐
엄마야 나는 왜자꾸만 슬퍼지지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울고 싶지
하루의 일과가 끝난 평온한 저녁, 아들이 소파 위에 누워 뒹굴거리다가 문득 툭, 한마디를 던졌다.
"엄마, 나 갑자기 슬퍼요."
아들은 가끔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슬프다'는 말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어서,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아들을 바라보았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어?"
아들은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럼 무슨 일이냐고 궁금해하는 나에게 아들이 말했다.
"엄마, 저는 아직도 가끔 서울이 그리워요."
방금도 아무 생각없이 뒹굴거리다가 문득 서울이 그리워졌다고 한다.
서울, 서울은 아들이 태어난 곳이다. 아들은 여섯살 까지 서울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사실 서울은 내 입장에서는 아이를 키우기에 참으로 힘든 곳이었다. 유치원도 추첨하여 들어가야했고, 추첨에서 떨어지면 유치원 '재수생'이 되어 한 해를 더 기다려야했다. 주변에 연고가 없어 아이들이 아플 때, 혹은 급하게 일정이 생겼을 때 대처하기도 힘들었다.
더욱이 서울에서, 나는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남편은 퇴근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오랫동안 유치원에 남아있어야 했다. 그 순간들이 외롭고 힘들었을 터인데, 오히려 서울 생활을 그리워한다는 아이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았다. 게다가 서울을 떠나 새로 정착한 곳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항상 옆에 계셔서 아이들도 더 살뜰한 보살핌을 받고 자랄 수 있었기에, 더더욱 아이의 생각이 궁금했다.
"서울에서 무엇이 그렇게 즐거웠니? 자주 생각나는 것이 뭐야?"
"음, 지하철 역에 있던 컵케이크 가게도 생각이 나고요, 집근처 높은 빌딩에 있던 밥집에서 자주 먹었던 녹두전도 가끔 먹고 싶어요. 살던 아파트 놀이터도 그립고, 유치원에 오래 남아있을 때 신경써주신 선생님도 보고싶고."
듣고보니 특별한 일에 대한 기억이 나이었다. 운전을 못하는 내가 지하철을 이용하여 애써 데리고 가주었던 서울숲과 어린이 대공원, 밤 늦게 한강을 산책하며 사먹었던 라면, 종종 다녔던 용산 박물관과 어린이 특별 프로그램, 신경써서 종류 별로 보여주었던 어린이 음악극에 대한 기억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집 주 변에 있어 일상으로 다녔던 곳에 관한 소소한 일들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런 평범한 일상이 그립다고 하는 것을 보니, 그 시간에 대한 아이의 그리움은 진.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움이라,
그러고보니,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나 또한 어릴 때 부터 느꼈던 것이 아니었나. 무엇을 그리워하는 지도 모른채 어떤 그리움이 자꾸만 내 안에서 나를 간지럽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인간은 모두 '그리움'을 함께 품고 태어나는가.
그 그리움의 실체는 무엇일까. 근원에 대한 갈망인가,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어린시절에 대한 애착인가,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한인가. 조용필의 노래 <고추잠자리>에 담긴 십대만의 감성인가, 아니면 인간이 평생을 지고 갈 형벌인가.
"엄마."
아이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잠깐의 상념에서 깨어났다.
"엄마, 저 그 때 더 열심히 살 걸 그랬어요."
"그때? 그때 언제?"
"어릴 때, 서울에서 살았을 때요."
나는 아이의 말이 엉뚱하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소리야. 너는 그 때 정말 어린 아이였는데. 너는 아이 답게 잘 자라왔어."
"아니에요, 더 열심히 살았어야 했어요.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살거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니?"
"제가 어렸을 때 더 열심히 살았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서울을 그리워하지 않았을 거에요. 아마도 그 순간에 대한 후회가 남아서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아이의 말에 순간 멍해졌다.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아이의 말을 듣고 웃어넘겼던 내가 부끄러워질 만큼, 아이의 말에는 울림이 있었다. 마음에 남은 그리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가열차게 고민한 끝에 한 말, 아이의 진지하고도 철학적인 탐색이 담겨있는 말이었던 것이다.
아이의 말에 어떻게 답을 해주어야 할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음......, 그리움이란, 누구나 마음 속에 다 가지고 있는 거야. 그리움이라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야. 어쩌면 그것이 너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지도 몰라."
"그럴까요?"
"그래, 그리고 그렇게 그리운 곳이라면 다시한 번 가보자. 올해가 지나기 전에 서울로 여행갈까?"
"좋아요!"
서울여행이라는 말로 대화는 화기애애하게 끝나고, 거실은 다시 평온이 감돌았다. 아이가 잠든 뒤, 불꺼진 거실에서 스탠드를 켜놓고 홀로 책을 읽다 보니, 다시 아이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러고보면 나 또한 마음 한켠에 서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 마음을 되새기다 보니 과거의 영상이 차례로 떠올랐다.
서울의 거리 거리마다 신나게 뛰어다니던, 지금보다 훨썬 어렸던 우리 아이들.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치열하게 살아내었던, 젊었던 남편과 나. 새벽 다섯시에 집을 나서 한문을 공부하러 다녔던 길, 그 때 함께 공부했던 학우들, 큰 가르침을 주셨던 선생님들. 사는 즐거움, 공부의 즐거움을 알아가던 그 순간들이 마음을 훑고 지나갔다.
상념이 지나가자, 문득 아이에게 했던 대답이 미흡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너무나 부족한 대답이었다.
'너는 어린 시절에 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다'고.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기에 오히려 그 순간이 그리운 것'이라고. 그렇게 대답했어야했다.
그리하여 늦은 밤, 잠든 아이를 향해 짧은 편지를 쓴다.
우리는 모두 그리움을 안고 태어난다. 그리움이란, 태어날 때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절실한 삶에 대한 의지. 그러므로 너와 나의 마음 속에 그리움이 맺혔다는 것은, 우리가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다.
아들아. 마음에 그리움이 가득해질 만큼 열심히 살자. 하루하루 달라지는 계절의 냄새를 느끼고, 걸음걸이의 진동을 기분좋게 즐기자. 그렇게 하루를 열심히 살아서 다시 훗날 떠올려 볼때, 매 순간이 그리워지는 삶을 살자. 그리고 우리, 서로를 더 그리워할 수 있게 더 열심히 사랑하자.
그리고 그 그리움들은 마음 속에 잘 간직해 두었다가 가끔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꺼내어 보자. 그리하면 그리움은, 우리의 입을 통해 언어로 모양을 짓고, 그대로 햇빛에 잘 마른 꽃잎이 되고, 향기로 퍼져,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해줄테니.
아들아, 우리, 그렇게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아마 나는 아직은 어린가봐 그런가봐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기다리지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보고 싶지
조용필 작곡 / 김순곤 작사 / 조용필 노래
아마 나는 아직은 어린가봐 그런가봐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기다리지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보고 싶지
아마 나는 아직은 어린가봐 그런가봐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슬퍼지지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울고 싶지
가을빛 물든 언덕에 들꽃 따러 왔다가
잠든 날 엄마야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외로움 젖은 마음으로 하늘을 보면
흰구름만 흘러가고
나는 어지러워 어지럼 뱅뱅
날아가는 고추 잠자리
아마 나는 아직은 어린가봐 그런가봐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기다리지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보고 싶지
가을 빛 물든 언덕에
들꽃 따러 왔다가 잠든 날
엄마야 나는 어디로 가는걸까
외로움 젖은 마음으로 하늘을 보면
흰구름만 흘러가고
나는 어지러워 어지럼 뱅뱅
날아가는 고추 잠자리
아마 나는 아직은 어린가봐 그런가봐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기다리지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보고 싶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