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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Oct 11. 2021

회색의 울림

<공유> by 이문수

https://www.youtube.com/watch?v=yxWenKxelCo







  시간이 이렇게 흘렀군요.

 내가 보는 세상이 회색빛으로 가득한 건 새삼스럽지 않은 일이죠.

 그러고 보면

 꼭 애절하게 사랑했던 연인만이 그런 건 아닌 것도 같습니다.

 한때는 소중했던 모든 것, 심지어 물건조차도

 상처 위 바르는 소독약처럼 

 떠올리면 통각을 자극하는 건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건물이 없어 온전히 발가벗은 지평선 위

 여전히 가득한 당신의 우상과 비교될 리 만무하더라도

 왜 지나간 소중한 것들은

 소중해서 감동을 남기기보다는

 왜 이토록 살갗을 벗겨내는 아픔만 주는지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길을 걷다 쇼윈도에 걸린 은은하게 아름다운 한복을 봤어요.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그 앞에.

 누가 봐도 짐작하기 수월했을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 떠올리고 있구나


 네

 맞습니다. 그랬습니다.

 당신이 그 옷을 입고 등장했다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완벽했을 것을

 그러나 상상을 해야만 했던 그날.

 이마가 예쁜 당신에게는 너무도 멋진 어울림이 되었을

 그 저고리와 치마는

 곧 당신이었습니다.


 나에게 입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좋으니 

 어떻게든 받아줄 수 없는 걸까요.

 없겠죠.

 없을 겁니다.


 유리에 비친 내 모습에 현타가 옵니다.

 발걸음을 돌립니다.


 분홍빛의 상상은 회색빛의 현실이 되어 하늘을 뒤덮습니다.

 네

 이게 세상입니다.

 내가 살아가고 살아가야 할.

  



 仙姿不合在風塵  獨抱瑤琴怨暮春     선자불합재풍진  독포요금원모춘


 絃到斷時腸亦斷  世間難得賞音人     현도단시장역단  세간난득상음인


 

 선녀 같은 네가 이 세상과 어울릴 턱이 있을까.   


 혼자 거문고 끌어안고 가는 봄날을 원망해보지만.


 거문고 줄이 끊어져 버렸네. 애간장마저 끊어지는 듯해.  


 그 미치도록 애달픈 소리 알아줄 사람. 세상에 있기나 할까.

  


 더 이상 다른 나라 사람의 시를 기웃거릴 필요가 없어.

 어쩌면 우리의 모든 시간들을 그렇게 완벽하게 그려주고 있을까, 우리의 시는.

 

 조선시대, 권필이란 사람이 매창에게 지어준 시라지? 누구의 신분이 어떻고 따위는 쓸데없는 이야기.

 그런 건 알고 싶지 않아.

 중요한 건 

 이 정도는 돼야 그나마 널 그릴 때 떠올릴 자격이 있다는 거야.


 말은 필요 없어. 옛사람들처럼 시를 지어 너에게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손바닥 안 소통이 일상이 된 지금인데 시 한 편 보낼 수 없다는 게 신기할 뿐이네.  

 

 선율이 공명이 되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드넓고 드높은 하늘이 좁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오장육부를 긁어 끄집어내는 사선의 소리는 

 기울어진 달에 반사되어 내 심장을 때리고 있습니다.

 선율은 진동이 되어 모든 것을 허물고 있는 중입니다. 

 허물어지는 모든 것은 너와 내가 아닙니다.

 세상입니다.

 

 어때요, 아쟁이란 악기는?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후벼내는 소리를 가진 존재일 줄은 몰랐습니다.

 

 서로 반대의 극성을 가져 우리가 함께 붙어 있었다면

 갑자기 둘 중 하나가 N극으로, 혹은 S극으로 바뀌어 버렸단 말인가요.

 순식간에 우리는 분리되어 버렸습니다. 이곳과 이곳의 지구 반대편으로. 

 슬퍼하고 억울해할 일만은 아닌지도.

 그렇다면 우리는 같은 극성을 지닌 존재들이 되어 버렸다는 얘기잖아요.

 같은 극성을 지니게 됐으니

 이제야 진정 하나가 된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가 된 것을 축하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아쟁의 소리는 그렇게

 축가가 되어 통곡을 합니다.

 

 나는 곧

 아쟁입니다.

 돌이킬 방법 없는 물아일체.


 회색의 날들을 축가로 물들이며 살아가리라는 멋스러운 각오.

 선율을 타고 온 몸을 맡기니

 회색 하늘 밑

 회색 호수가 되어 버립니다.


 평온합니다.


 평온함이 이끄는 그곳.

 호수의 바닥.


 이젠 쉴 때입니다.


 한 숨 자야 겠어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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