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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Oct 11. 2021

雨林

[원스어폰어타임인아메리카]OST중<Deborah's Theme>

https://www.youtube.com/watch?v=PuyYc0gINbU







  과거를 배경으로 했지만 음울한 도시가 무대가 된 영화였음에도 왠지 오늘은 산 쪽을 향하고 싶었습니다. 

 초록색이 보고 싶었어요. 

 창 너머 보이는 동산의 초록 정도가 아닌, 압도하는 빽빽한 숲에서 방출되는 숨 막히는 초록. 

 내리는 비를 머금어 심지어 반짝거리기까지 하는 물감의 초록.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온통 초록뿐인 세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치유의 에네르기가 필요했나 봅니다.

 누가 봐도 사치스러울 수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행복한 거죠, 이쯤이면.

 마음에 상처가 났다며 산으로 향할 수 있는 여유.

 그러니 그렇게 절망적인 상태는 아닌 것도 같군요. 

 세상을 잃은 척 멍청히 뜬 두 눈을 보이는 것 또한 송구하기까지 합니다.

 

 왜 이럴까.

 정선의 숲 속으로 달려갈 수 있는 내면의 여유 때문에 나조차 당황스러울 지경인 것을.

 마치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아. 

 그거였습니다.

 그것이었어요.

 그랬군요.

 

 언젠가부터 초조와 불안이 슬그머니 찾아왔던 게 기억납니다.

 애써 내색은 하지 않으려 했지만

 세면대에 떨어진 휴지에 물이 서서히 스며들 듯 

 주사를 맞은 팔뚝에 서서히 찾아오는 근육통처럼

 묵직한 무엇들이 몸속에서 뭉쳐져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알 수 없는 답답함이 시작된 바로 그때부터 

 당신이란 유리에 붙어있던 내 몸은 천천히 천천히 분리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어떻게든 붙잡고 싶은 나라는 유리에서 당신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는 게 맞겠군요.

 유리는 손이 없으니

 땅으로 추락하려는 접착물을 잡아줄 수 없는

 바로 그 허망함. 무능력함. 비루한 절망. 최악의 좌절. 


 묵직함을 감지했던 그때로 돌아간다면 모든 걸 제자리로 돌릴 수 있었을까요.

 제자리라니. 우습군요, 갑자기.

 뭐가 제자리라는 말인지.

 당신과 내가 함께 해야만 세상이 제자리가 된다는 말인가요.

 내가 뭔데.

 당신이 떨어져 나갔어도 이 세상은 하등 바뀌는 게 없습니다.

 그런가 보다. 하는 거죠.

 내가 뭐라고.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단지 시간을 좀 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찾아온 숲이니

 너무 재수 없게 생각하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잠시만 있다가 가겠습니다.

 초록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보잘것없는 누추한 감정과는 상관없이 

 비를 맞으며 뿜어내는 숲의 입김이

 어쨌든 상쾌하군요.

 실컷 들이쉬는 큰 숨과 함께

 숲 속으로 빨려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런 흔적 없이.


 


 한참을 서 있습니다.

 태어나서 이렇게 차분해진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혹은 정말 숲에 빨려 들어 숲의 일부가 된 것처럼.

 아니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나만의 제자리가 엉망이 된 지금 당장은 멍해질 수밖에.

 어쩌면 시간이 더 지나고 나야 악마 같을 고통은 찾아오는 건지도.

 그 무시무시한 위력의 악마가 다가오기 전에

 일단은 마음의 준비하고 있으라고

 이렇듯 차분함이 먼저 온 몸을 덧씌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난도질당하기 전 얇게나마 코팅이라도 해 두라는 배려.

 

 네

 유난 떨지 않고 차분함을 즐길 작정입니다.

 경박스럽게 울고 불며 악마를 맞이하지도 않겠습니다.

 상실과 이별이란 그런 것일 테니까요.

 원래 그런 것.

 왔다 가는 건데 뭐.


 춤추는 데보라를 훔쳐보는 누들스.

 숨이 멎을 듯한 순간

 시간은 정말로 정지되어 버립니다.

 분명 데보라는 춤을 추고 있는데

 누들스의 시간은 멈추어버린다는 말입니다.

 덩달아 관객들의 시간과 숨도 멈추어버립니다.

 누구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적막이란 이런 것.

 그렇습니다.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까지 생생할 삶의 몇 장면들은

 적막과 함께 기억되는 법입니다.

 

 당신의 모습도 그랬습니다.

 데보라를 바라본 누들스처럼.

 아니 그보다 더한 충격으로 

 적막을 넘어 착란이 올 지경이었습니다.

 내가 본 당신은 그랬습니다.

 

 얼마나 축복된 일일까요.

 차분함 뒤 찾아올 절망. 그리고 남은 시간들. 

 숨이 멎는 날의 침대 위에서

 난 당신의 모습을 선명히 떠올릴 수 있게 됐습니다.

 돌아가는 영사기에서 쏘는 희뿌연 빛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당신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 됐습니다.

 하나의 기억만 가지고 차원을 넘어가야 한다면 

 고민이 필요 없게 됐으니까요.

 악마와 사투를 벌이는 게 그 대가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영원한 기억이라는 달콤한 열매가 기다리고 있으니. 

   

 단단한 각오가 차분함의 강도를 더하게 합니다.

 우습기까지 하군요.

 강해진 차분함.

 그런 게 있을 턱이 있나.

 모순이어도 좋고 아이러니라도 상관없습니다.

 갖고 갈 기억만 있다면.

 

 비를 품었던 산에서 안개가 피어오릅니다.

 신령스런 장면.

 어쩌면 물기와 습기를 핑계 삼아 숲은

 쌓여있던 악몽의 찌꺼기들을 쏟아내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얼마든지 쏟아내기를.

 얼마든지 감상해 줄테니까.


 초록으로 덮인 시야를 비집고

 봉우리 사이의 잿빛 하늘이 떠오릅니다.

 그 하늘 속

 당신의 얼굴이 박혀 있습니다.

 들키지 않으려 했지만 들킬 수밖에 었었던

 그날의 시선 속 모습 그대로


 당신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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