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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김철기 Oct 12. 2021

아내의 뒤꽁무니를 쫓는 남자

파킨슨병 환자의 보행장애 극복법

  우리는 제각기 가정에서 아내의 위치를 남편보다 위에 두고 존중하는 소위 '경처가 남편' 임을 자처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스갯소리지만 아내와 함께 걸어갈 때 '아내의 그림자도 밟지 말아라' 하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을 것이다.

 여성주의(페미니즘)가 점점 강조되면서 상대적으로 주눅 들어가는 남편들의 처지를 희화화한 말일 것이다. 특히 생리적으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호르몬의 작용으로 여성들은 점점 남성화돼가고 있는 반면에 남성들은 TV 드라마를 보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잦아지는 등 여성화 과정을 대부분이 거치게 된다. 게다가 은퇴를 전후한 우리 세대의 경우 남편들의 경제력이 쇠퇴하거나 건강이 약화되면서 본의 아니게 아내의 눈치를 살피고 아내가 잔소리를 하거나 버럭 고함을 지르는 상황을 피해 보기 위해 우리 남편들은 눈물겨운 노력을 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더더구나 파킨슨병이라는 희귀성 질환을 불치병으로 갖고 십 년 넘게 살아온 나의 경우에는 남들보다는 몇 배 더 '보호자'인 아내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그런데 이 파킨슨병이라는 병이 참으로 고약하다. 쉴 새 없이 굳어지는 팔다리와 몸의 근육들을 틈 나는 대로 풀어줘야 몸이 움직일 수 있고 넘어지지 않고 걸음을 걸을 수 있다. 특히 발목이 쉽게 굳어져 걸음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균형을 잃고 넘어져 손목과 팔을 다치는 경우가 가장 빈번하게 발생한다. 여러분께서도 아마도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에서 길을 건너다가 중간에서 '얼음 땡'놀이를 하듯이 바닥에서 발을 떼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환우들을 목격한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 환우들 간에는 이 것을 발이 얼어붙는 프리징 (freezing) 현상이라 부른다. 이런 환우를 보게 되면 주저 없이 손을 내밀어 함께 걷도록 도와주셨으면 한다.

 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집안에서 내 방에서 거실로 또는 화장실로 옮기다가 발을 떼지 못하고 넘어지는  경우가 하루에도 십여 번 발생한다. 결국에는 식구들과 상의를 해서 보행 보조기를 주문해 몇 달째 사용해 오고 있는데 가구나 방바닥에 부딪혀 양팔이나 얼굴을 다치는 사고를 상당히 막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집 밖에 나갈 때는 남들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 않지만 지팡이를 여러 벌 주문해서 때때로 사용해 왔다.


나는 중고등학교 다닐 때 텀블링과 낙법을 잘 배워 시범을 보이곤 했는데 그 덕을 크게 보고 있다. 만약에 그렇지 않은 경우였다면 넘어져 얼굴이나 이빨을 다칠 뻔한 순간들이 수십 차례는 족히 있었으리라. 나는 걸음을 잘 못 걷는 대신에 소형 자전거를 타는 것을 좋아하며 웬만한 동네에서 하는 일상 활동(수영장, 헬스장, 기수련, 은행 방문 등등)에는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몇 년 전에 저녁 어두워진 시간에 옆 동네에 있는 이마트에 다녀오던 길이었는데 내리막 보도길을 자전거로 속도감 있게 내려오던 중 가겟집 앞에 희끄무레한 것이 눈에 띄어 급 브레이크를 잡았다. 보도 옆 상가공사를 하다가 모래주머니로 길을 막아두었던 것인데 어두워서 미리 보지 못해 내리막길에서 얼떨결에 앞 브레이크를 급하게 잡았으니 어떻게 됐을까? 이는 마치 승마 경기를 하던 중 전속력으로 달리던 말이 장애물에 앞발이 걸려 쓰러지는 장면과 같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컴컴한 밤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자전거 위로 몇 미터를 굴러 떨어지는 순간 몸에 밴 공중회전 낙법 자세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취했는데, 그 요령은 오른손으로 땅을 짚어 착지하면서 적당하게 체중을 싣는 동시에 왼쪽 팔과 어깨 전체를 둥글게 만들어 회전하면서 일어나는 것이다. 회전 낙법으로 몸을 한바퀴 굴려 일어난 순간 등 뒤에서 자전거가 크게 한 바퀴 돌아서 떨어지며 덮쳐오는 것을 육감적으로 감지하고 오른팔을 뻗었는데 마침 자전거 앞바퀴가 손에 들어와서 이를 잡아 자전거를 땅 위에 세우고 순간적으로 안장에 올라앉았던 것이다.

 이는 내리막 길을 달리던 자전거가 장애물에 걸려 나와 함께 크게 한 바퀴를 돌아서 보도 위에 멈춰 서고 그 위에 내가 올라 탄 불과 이삼 초 만에 일어난 연속 동작이다. 만약 그때가 낮시간이었고 주변에 행인들이 보고 있었다면 이 장면에 큰 박수를 쳤을 것에 틀림없으리라. 올림픽 도마 경기를 준비하던 양학선 선수라 해도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렇게 완벽한 착지와 회전 낙법에 이어 뒤에서 덮쳐온 자전거를 감각적으로 손으로 잡아서 세운 즉시 안장에 탈 수 있었을까 싶다. 그때 구사일생으로 무사히 구제받은 일을 나는 두고두고 감사히 여기고 있다.


글을 쓰다가 본의 아니게 한참을 옆길로 새 버려서 죄송스럽다. 그러나 내가 몸이 불편해진 후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오고 있었는지에 관련된, 원체 일어나기 힘든 흥미로운 실화인지라 독자 여러분께서 양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내가 어찌하여 불경스럽게(?) 아내의 뒤꽁무니를 쫓는 사람이 되었을까?를 설명드리겠다. 이 비밀 아닌 비법을 나와 같은 보행장애를 겪고 있는 환우들이 따라 보면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아내는 평소에 내가 어려워하는 걸음 걷기를 독려해서 혼자서 걷고 독자적인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에 몰두해 오고 있다. 사실이지 사람이 혼자서 걸을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일상생활을 하는 데 한 두 사람의 풀타임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된다. 가뜩이나 몸이 약한 아내는 내가 자력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될 때를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 그날은 언젠가 꼭 올 것 같으며 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하루라도 이러한 상태가 오는 날을 늦춰 보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하루 중에 아내로부터 듣는 말 가운데 가장 흔하게 들어온 말이 "틈나는 대로 자꾸 걸어요" 걸음을 제대로 걷도록해요" "왼 발, 오른발, 하나, 둘... " 등 걷기와 관련한 말이다. 그런 아내가 가장 반가워하는 내 말은 "여보, 우리 나가서 걸읍시다" 또는 "여보, 오늘은 뒷산에 올라갈까?"이다. 이때 아내는 몸이 아무리 피곤해도 즐겁게 길을 나서곤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수지구 지역에는 아파트에 곧바로 붙어있는 공원과 그 반대편에 정평천이 있고 바로 뒤편에 광교산이 있어 걷기를 생활화해야 하는 내게는 기가 막히게 안성맞춤의 조건이라 생각된다. 내가 국제기구에서 20년 가까이 일한 후 지병으로 인해 조기 은퇴하고 귀국 후 이곳에 정착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한 두 달 전에 기발한 발견을 했는데 그것이 바로 아내의 뒤꽁무니를 쫓아 걷기이다.

 우연히 유튜브 동영상에서 어느 전문가께서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경우 반복되는 동작 중에 처음에 하고자 했던 기본을 쉽게 잊어버리고 동작이 흐트러지는 것이 특징이다"라는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 전문가께서 예로 든 동작이 글쓰기인데 파킨슨병 환우라면 예외 없이 겪고 있을 첫자를 쓰기 시작한 후에 몇 자룰 쓰기 전에 글씨가 점점 적어지면서 마치 지렁이가 지나간 흔적을 남기게 된다. 같은 동작을 몇 번 거듭하는 과정에서 기본을 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길을 걸을 때도 블록이 분명한 인도를 걷거나 흰색 페인트로 선을 표시해 놓은 건널목을 건너갈 때는 한 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머릿속에서 기본을 리마인드 해 주기 때문에 훨씬 수월하게 걸을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착안한 것이 바로 다른 사람을 앞세우고 그 족적을 쫓아 걸음을 걸으면 한걸음 내딛는 때마다 기본을 리마인드 해 주지 않을까 나름대로 궁리한 것이다. 그래서 옆에서 함께 걷던 아내에게 "여보, 혹시 내 바로 앞에서 걸어 보면 어떨까?" 제안을 해 봤는데 빙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아내가 내 앞에서 걷는 그대로 왼발 오른발을 떼기가 무섭게 아내의 족적에 내가 왼발 오른발을 디디며 따라서 걸어보니 아내와 똑같이 경쾌한 보폭과 속도로 걸을 수 있었다. 맨날 아내가 내 옆에서 걸으면서 "왜 자꾸 발을 땅에 끄느냐? 자꾸 뒤 처지느냐?" 등 격려의 잔소리를 늘 입에 붙이고 걸었는데 그럴 필요가 싹 사라졌다. 지금은 아내가 내 앞을 걸으며 이렇게 말한다. "발을 끌지도, 숨도 가쁘지 않게 참 잘 걷네요." 이 얘기를 들은 나는 신이 나서 더욱더 잘 걷게 된다.

이는 한걸음, 한걸음마다 실시각 (real-time)으로 나의 뇌가 기본을 리마인드 해 주기 때문이다.

  이후 세상에 그렇게 힘들어했던 걸음 걷기가 그렇게 즐거운 취미로 바뀌어 버렸다.


남들이 보기에는" 왜 저 부부는 꽁무니를 쫓는가?" 하고 의아해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고 나름대로의 비밀을 즐기고 있다.


평소에 "세살짜리도 잘 걷는 걸음을 왜 못 걷느냐" 고 핀잔을 주던 아내가 나의 나아진 걸음걸이에 남모르게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음을 서로가 말하지 않아도 교감하면서....

  아내가 내게 해주는 것이 너무나 많구나!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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