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수의 손은 까맸다. 그냥 까만 게 아니라 더럽게 까맸다. 손톱도 길었는데 노인의 발톱처럼 거칠고 노랬다. 그 밑으로는 검정 때가 끼어 있었다. 뼈 마디가 얇아 그 위를 덮은 피부가 더 잘게 주름이 잡혀 있었고 그 주름 사이사이는 피부보다 더 까매 보였다. 동수는 타이어에 앉아 모래를 만지고 있었다. 모래사장 안에 철봉이 있었고 모래사장을 둘러 타이어가 꽂혀 있었다. 거기에 동수가 앉아 있었다. 동수는 내가 가까이 갈 때까지 고개도 들지 않고 모래를 만지고 있었다. 뭔가를 그리는 건지 그냥 모래를 파헤치는 건지 잘 구분이 안되고 양손 검지손가락 쭉 펴서 바닥을 만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내 그림자가 동수의 그 까만 손을 덮었다. 그제야 동수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한 여름의 아지랑이처럼 시간이 멎은 듯한 정적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지만 동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모래를 만지작 거렸다. 나는 발끝으로 모래를 살짝 차서 동수의 손에 모래를 날렸다. 생각보다 발에 힘이 더 들어갔는지 동수의 몸까지 모래가 튀었다. 그러니 다시 동수가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왠지 그게 웃겨 키드득 하고 웃었다. 괴롭히려고 그런 건 아니고 왠지 그냥 장난치고 싶었다. 동수는 나를 가만 보더니 모래를 한 움큼 쥐어 내 발 쪽에 뿌렸다. 그리고 자기도 그게 웃기는지 이빨을 보이며 웃었다. 나는 동수 옆에 앉았다.
"여기서 뭐 해?"
"뭐를" 동수는 다시 손가락으로 모래를 만지기 시작했다.
"모래는 왜 만지는 건데?"
"몰라"
모래사장엔 우리 둘밖에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시소를 하는 아이들이 있었고 운동장 중앙에선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순간 누군가 나랑 동수가 같이 있는 걸 보고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 주변을 살폈지만 아는 얼굴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날 내가 따라가고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아까 내가 먼저 물었었는데, 나를 왜 따라온 거냐고"
"아... 나도 몰라"
"뭐?"
"나도 모른다고"
나의 대답에 동수는 다시 답이 없었다. 까만 손으로 바닥의 모래를 만지작 거렸다. 내가 동수에게 모른다고 한 건 명확한 이유를 나 스스로도 잘 몰랐기 때문이다. 말하기 부끄럽다거나, 못할 짓을 한 것 같다거나,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진짜 잘 모르겠다는 것이 내가 동수에게 ‘모른다고’한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이렇게는 대화가 안 될 것 같았고 자꾸 모래만 만지는 동수를 보니 (그럴리야 없겠지만) 두더지처럼 그냥 모래 속으로 파고 들어가 버릴 것 같았다. 일단 뭐라도 대답을 해야 했다.
“그냥 궁금했어, 너 맨날 조퇴하잖아. 뭐 하러 가나 궁금했어. 그래서 따라 간 거고”
“그래서?”
“응? 뭐가 그래서?”
“그래서 궁금한 게 해결 됐어?”
“아니, 뭐…”
“슈퍼 들렀을 때부터 알았어. 전봇대 뒤에 너 숨어 있는 거 보이던데? 그때까지만 해도 나를 따라오는 건지 아닌지 헷갈렸는데, 그 후로도 계속 따라오길래 알았지.”
머리끝부터 뭔가 어지러운 것 같았다. 동수는 절대 모른다고 생각했던 나였다. 나에게 빈틈이 있었다면 그 골목에서 자동차와 부딪힐 뻔했던 그 순간, 그때 밖에 없었다.
“아닌데? 몰랐을 텐데? 네가 나를 봤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 거야 모르지. 그래도 나는 봤다니까.”
축구공 하나가 우리 쪽으로 날라 왔다. 날라 오는 세기로 봐서는 우리 쪽 까지 날아올 줄 알았지만 쌓여 있는 모래에선 이내 힘을 잃고 우리보다 이삼 미터 앞쪽에서 공이 멈췄다. 공을 주우러 온 건 우리 반 진영이였다. 그는 공을 주우 러 와서 나에게 눈길을 주더니 ‘뭐 해?’라고 했다. 그리고 동수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머릿속으로 뭔가를 추측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 대답은 듣지 않고 이내 다시 축구를 하러 갔다.
“미안해” 동수에게 말했다.
“뭐가?”
“그날 너 미행해서”
“미안할 건 없는데?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왜 나를 따라온 건지”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동수는 마지막 말을 하고 하얗게 웃었다. 하얗게 웃는다는 것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동수의 웃음은 하얬고 그의 웃음에 나도 기분이 좋았다.
“너 킹오브 잘하냐?”
“왜?”
“뭐 자꾸 왜야. 잘하면 한번 뜨자고”
“그러든지”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활기찼던 운동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휑해졌고 몇 안 남은 학생들도 빠른 걸음으로 건물에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지만, 동수는 엉덩이를 털진 않고 모래 묻은 손을 자기 바지에 비볐다. 동수의 바지를 털어줄까, 싶었지만 선뜻 손이 나가지 않았다. 일단 교실로 들어가야 했다. 교실로 걸어가는 데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의 설레고 불안한 마음, 거기에서 설렘만을 쏙 빼놓은 기분이 랄까. 학교 건물에 들어가 걷는데 복도가 한결 더 어두워 보였고 대리석 바닥에선 특유의 차가운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천장의 조명이 켜져 있었지만 희미한 불빛에 존재감은 미미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변한 건 없었다. 점심시간을 보냈을 뿐이고, 동수와 잠깐 이야기를 했을 뿐이고, 그와 함께 교실로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눈에는 자꾸 동수의 까만 손이 들어왔고 동수가 웃을 때의 하얀 미소가 자꾸 눈에 밟혔다.
<14>
아내와의 첫 데이트 때 우리는 상수역 4번 출구에서 만났다. 약속 시간보다 15분 일찍 도착해 그녀를 기다렸다. 오른손에는 검정 우산을 들고 있었다. 오후에 비 예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은 어두웠지만 아직 비는 오지 않았고 날씨가 흐려도 마음은 설렜다. 지하철 출구와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을 번갈아 보며 손목시계의 초침 바늘을 몇 번이나 들여다봤다. 초침 바늘이 어느 때보다 느리게 갔다. 지구상에 무중력의 공간이 있다면 그건 연인을 기다리는 누군가의 마음 속일 것이다. 붕 뜬 감정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녀를 만날 생각에 두발이 지면에서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역 앞을 지나는 낯선 여자들에게 눈이 갔지만 마음은 이내 손목시계의 초침으로 돌아왔고 느리게 흐르는 초침을 아쉬워했다. 어서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약속한 시간이 5분이 지났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정도야 괜찮지 뭐, 하며 마음을 달래는데 머리 위로 빗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눈에 보기엔 비가 안 오는 것 같았는데 머리에 어깨에 한 방울씩 비가 떨어졌다. 안 되겠다 싶어 우산을 펼쳤다. 어깨에 묻은 빗방울을 터는 우산 안으로 갑자기 누가 들어왔다. 그녀였다. 하얀 얼굴로 맑게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늦어서 미안해요. 근데 제가 우산을 안 가져왔어요”
그때 그 말을 했던 그녀의 얼굴, 표정, 내려간 눈꼬리, 붉게 빛나는 투명한 아랫입술, 하얀 이빨, 동그란 볼살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우산을 같이 쓰고 우리는 태국 음식점에 갔다. 현지의 느낌을 내면서 분위기도 괜찮은 곳이었다. 소개팅처럼 파스타를 먹기엔 식상해 나름대로 고민해서 간 곳이었다. 그녀도 그곳을 마음에 들어 했고 자리에 앉아 팟타이와 푸팟퐁 카레를 주문했다. 점심시간이었지만 맥주도 한 잔씩 시켰다.
“아침에 햇살이 맑아서 비가 올 줄 몰랐어요” 그녀가 말했다.
“저는 일기 예보를 챙겨 듣는 편이 어서요”
“꼼꼼하신 가봐요. 저는 좀 덜렁 거려서요” 하며 다시 한번 웃었다. 작고 고른 하얀 이에 눈이 갔다.
“한 명만 챙기면 되죠” 그녀의 덜렁거림이 고맙기까지 했다. 덕분에 우산을 같이 쓸 수 있었으니.
맥주가 먼저 나왔다. 나는 시나몬 가루가 뿌려진 흙맥주였고 그녀는 레몬향이 나는 에일이었다. 미니 프레첼도 작은 종지에 담겨 안주로 나왔다. 짠하고 맥주를 마셨다. 내가 시킨 건 시원하고 쌉싸름했다. 당신을 좋아한다고, 아니 어쩌면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당장 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 같았다. 기분만큼은 그랬지만 말하지 않았다. 이 여자와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하려면 그런 말은 참아야 했다. 주문한 음식 맛이 더없이 좋았다. 살다 보면 모든 게 망치는 날이 있는 가 하면 모든 게 순조로운 날도 있다. 음식 맛 덕분에 분위기가 더 밝아졌다. 우리는 서로 할 말이 많았다. 궁금한 것도 많았다. 어떻게 살았는지, 뭘 좋아하는지, 취미는 뭔지, 하루는 어떻게 보내는지, 운동은 좋아하는지, 영화 취향은 뭔지, 드라마는 보는지, 책은 가끔 읽는지, 등등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가 당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표현도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조금씩 했다. 범인을 취조하는 자리가 아닌 이상 어쩌면 그건 필수적이고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묶은 머리가 잘 어울린다 든 지, 손가락이 가늘고 예쁘다 든 지, 원피스 톤이 잘 어울린다든지 하는 말들은 중간중간 섞었다. 결과적으로 그녀와 연인이 되고 나서 그녀를 유혹하기 위한 나의 말들이 참 센스 있고 매력적이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아내는 그런 내 말들이 오히려 어설퍼서 더 귀여웠다고 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인연이 이어진 데에는 그런 작업의 기술보다 조금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외적인 매력일 수도 있었고 성격적인 부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실은 서로가 가진 결핍이 닮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건석이가 무단 조퇴를 하고, 건석이의 아버지를 만나고, 영준이의 병문안을 갔던 그 주 토요일 저녁 나는 아내와 연남동에서 데이트를 했다. 일본전골이 맛있는 이자카야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러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그때 갔었던 태국 음식점의 분위기, 입었던 옷, 나눴던 대화 등등이었다. 내 작업 멘트가 어설펐다는 아내의 말에 그러면 당신은 나를 꼬시기 위해 한 게 있느냐고 내가 물었다.
“기억 안 나?” 아내가 말했다.
“뭐가?”
“뭐 생각나는 거 없어?”
“흠.. 잘 모르겠는데? 너무 오래돼서 그런 가?”
“그때 내가 당신 립글로스 빌려달라고 했잖아. 깜빡하고 내 걸 안 들고 왔다고”
“그랬나?”
“응 그래서 당신 립글로스를 내가 그 자리에서 발랐잖아. 내 입술에”
“아, 그랬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근데 그게 왜?”
“그게 뭔지 모르겠어?”
“뭐가? 없어서 그냥 빌린 거 아니야?” 처음 듣는 외국어로 질문을 받을 때의 표정, 그런 표정으로 내가 물었다.
아내는 별 대답 없이 웃었다. 공원에서 산책할 때 누군가 데리고 나온 애완견을 볼 때의 미소였다. 내가 대답을 재촉하는 표정을 짓자, ‘하여튼, 귀엽다니까’라고 했다.
저녁을 먹고 우리는 경의선 숲길을 걸었다. 벚꽃 나무에 연한 새순이 돋아 있었고 따뜻한 날씨에 거리에 사람들이 많았다. 공기는 얇은 재킷을 입었을 때 덥지도 춥지도 않을 정도로 적당했다. 시내 데이트는 오랜만이었다. 아내가 먼저 나오자고 했고 추측건대 요새 내 기분을 배려한 제안이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다. 아내는 늘 그런 식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내 기분을 짐작했고 그에 맞게 나를 배려했다. 저녁을 먹을 때 첫 데이트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지 상수역 쪽으로 걷고 싶었다. 그쪽으로 가자는 제안에 아내는 좋다고 했다. 숲길에서 벗어나 상수역 방향으로 걸음을 틀었다. 카페와 술집이 즐비한 골목이 나왔다. 연애할 때 자주 걷던 거리였다. 오랜만에 왔더니 거리 풍경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우리가 자주 가던 카페도 폐점했고 그 자리에는 소품 샵이 들어서 있었다. 아내도 비슷한 걸 느꼈는지 나에게 말했다.
“시간이란 참 신기해”
“시간이?”
“응”
“뭐가 신기한데?” 차도와 가까운 쪽 인도로 걷는 아내와 자리를 바꿨다. 언제부턴가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처음 여보 만나고, 데이트하고, 추억이 많았던 곳인데, 오랜만에 와보니까 거리가 많이 변한 것 같으면서도,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으면서도, 기분이 묘하네. 우리 벌써 알게 된 지 13년이 넘었잖아.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야. 13년 동안 알고 지냈고 각자, 또 우리가, 많이 변한 것 같으면서도 잠깐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것 같기도 해. 시간은 계속 흐르고 스쳐간 날들은 뒤로 그냥 사라진다고 할까. 오늘의 내가 과거의 내가 되고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내가 되는데 내일의 나도 오늘의 나도 그게 과거의 내가 되어버리면 만날 수도 만질 수도 없잖아.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들은, 이 거리에서 나눴던 기억들은 그렇다면 존재하는 걸까, 존재하지 않는 걸까. 다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하면 조금 슬퍼. 오늘의 나도, 내일의 당신도. 모두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면 그래. 결국 사는 건 죽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을까, 살아가는 건 죽어가는 거라고 말이야.”
“사는 건 죽는 거다,라고?”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야.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나는 봄이 싫어 여보”
“그래, 몇 번 말했었어”
아내는 봄을 별로 안 좋아했다. 낙엽이 지는 가을에 누군가는 쓸쓸함을 느끼는 것처럼, 아내는 꽃이 피는 봄에 쓸쓸함을 느꼈다. 꽃이 금방 피었다 지는 게 아쉽다고, 그게 쓸쓸하다고 했다. 처음 몇 번인 가는 그래도 꽃이 피는 그 순간이 좋지 않느냐고, 그 순간에 집중하면 그래도 봄이 좋을 수도 있지 않냐고 말해본 적도 있지만 아내는 와닿지 않는다고 했다. 반대로 아내의 마음이 왜 그런지 나도 몇 번 이해해보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잘 되진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냥 인정하고 말았다. 세상에는 가을이 쓸쓸한 사람이 있고, 겨울이 반가운 사람이 있고, 여름이 즐거운 사람이 있듯이, 봄이 쓸쓸한 사람도 있는 거라고, 그게 내 아내라고 인정하고 말았다. 내가 맞다고 그녀를 이해시킬 것도 없었고 그녀의 생각이 맞다고 내가 똑같은 사람이 될 수도 없었다. 부부 사이라 하더라도 때때로 어떤 부분에서는 우주보다 멀 수도 있는 일이었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사랑하고, 아무리 같이 시간을 보내고, 결혼해 같이 산다고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가장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알아?” 아내는 나의 새끼손가락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뭔데?”
“당신이 사라지는 거”
“내가 왜 사라져”
“어떻게 알겠어.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안 사라져. 걱정하지 마”
“건강해야 돼, 다치지도 말고”
“당신도”
“내 걱정은 하지 마” 아내가 웃었다.
“당신 도야. 내 걱정은 하지 마” 나도 웃었다.
아내와 나는 그렇게 홍대에서 상수, 합정에 이르는 밤거리를 걸었다. 코로나 이후로 소비문화가 변했고 물가가 비싸져 외출을 삼가는 사람들이 늘었다지만 봄기운 넘실거리는 토요일 밤 이 번화가는 여전히 화려했다. 테라스 있는 술집엔 사람들이 가득했고 그 옆을 지나기만 해도 그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구리게 울렸다. 가게들은 갖은 조명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조명 불빛의 잔상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이 시간과 이 거리를 즐기는 것 같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아내와 추억이 있는 곳에 와서 좋았다. 저녁으로 먹은 일본전골도 맛있었고 반주로 마신 하이볼도 시원하고 좋았다. 하지만 곧 끝날 봄을 쓸쓸해하는 아내처럼 나 역시 빛이 밝을수록 어둠이 짙다는 걸 알고 있다. 이곳에선 모두가 행복해 보이지만 각자의 마음속엔 어떤 아픔이 있을지 겉으로는 알 수 없다. 사실 사람들은 모두가 훌륭한 연기자인 것이다. 나 역시 좋고 행복하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마음 한편에선 영준과 건석의 이야기가 맴돌았다. 그리고 요즘 들어 자꾸 어렸을 때 내가 미행했던 동수가 떠올랐다. 어둡고 냄새났던 동수의 집, 노랗고 핏줄 섰던 동수 아버지의 눈동자, 까맣고 떼 낀 동수의 손등,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여보, 무슨 생각해?” 아내가 내 눈을 보며 물었다.
“어, 아니야, 별 생각 안 했어”
“이제 집에 갈까? 조금 추워지려고 해”
“그래, 그만 가자”
그렇게,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