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봉 앞에서 동수와 대면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내가 무단으로 조퇴를 했던 이후로 부모님은 저녁을 먹을 때마다 학교에서 무슨 일은 없었냐고 물었다. 못 미더워 취조를 하는 듯한 느낌으로 물어보는 건 아니었다. 부모님은 나라는 존재에 대해 신뢰가 있었고 그건 내가 믿을 만한 아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믿음을 주니 안 주니를 거론할 나이도 아니었지만) 애초에 부모님 두 분의 천성이 신뢰를 기반으로 타인과 관계를 하는 분들이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남에게 괜한 의심을 품지 않는 분들이라는 건데, 기본적으로 인간의 나쁜 면보다는 좋은 면을 보는 분들이었다. 보다 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은 나를 지지해줬고, 믿어 줬고,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뿌리는 데 더없이 알맞은 온도와 습도의 땅이 되어 주셨다. 무단 조퇴를 한 뒤로도 그들이 나를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가 변한 건 없었지만 학교에서의 일을 매일 묻는 그 말에는 어떤 불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불안함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당당했지만 한편으로는 당당하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학교에서 선생님 말씀도 잘 듣는 편이고 (생활기록부에 나오는 것처럼) 친구들과의 관계도 원만했으며 공부도 그런대로 뒤처지지 않는 편이었다. 무단 조퇴를 한번 했다고 나라는 사람이 변할 이유는 없었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러니 부모님의 불안에 대해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뭔가 마음에 찔리는 건 동수를 미행했던 그날 이후로 내 안에 어떤 균열이 일어났기 때문이고 그 균열은 나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렵고 더군다나 누군가에게도 이야기하기 어려운 묘한 뒤틀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꾸 동수에게 관심이 갔고 그가 밥은 먹는지 안 먹는지 오늘은 조퇴를 하는지 안 하는지, 그런 것들을 관찰했다. 동수는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복도에서 마주쳐도 눈 한번 마주치지 않았고 교실에서 수업시간이나 쉬는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런 상태와 원래가 나와 동수의 관계긴 했다. 나와 동수는 같은 반 학우였지만 친구는 아니었고 그건 나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동수는 철저히 혼자였고 친구들은 동수를 멀리했다. 그러니 나를 아는 체하지 않는 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원래 그랬고 그게 보통이었다. 굳이 이상한 걸 따지자면 내가 동수를 미행한 게 그랬고 모래사장에서 동수와 대화를 했던 게 그랬다. 그러니 지금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것뿐이었다. 아는 체하지 않고 말을 걸지 않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심 동수가 먼저 아는 체하거나 나를 향한 어떤 것이라도 신호를 보내줬으면 못 이기는 척 응해볼 마음은 있었지만 먼저 그럴 용기는 없었다. 학교에서 또 그러기엔 다른 친구들의 눈이 왠지 신경 쓰였고 남들의 눈치 보는 걸 떠나서도 딱히 동수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내 상황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에겐 절대 그럴 수 없었고 왠지 부모님에게도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생각해 보면 설사 말을 한다고 해도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다. 할 말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그건 동수에 대한 내 관심이 어떤 이유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돌아왔다. 동수는 나한테 연민의 대상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일 수도 있다. 둘 다 일지도 모르고 둘 다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든 동수의 집을 보고, 동수의 아버지를 보고, 뒤통수를 맞는 동수를 보고, 자꾸 그 잔상이 마음에 남았다. 그에 비해 우리 집은 30평대 아파트에 부지런한 엄마 덕에 바닥에 먼지도 거의 없었고 자상한 아빠는 나랑 같이 축구도 해주고 목욕탕에서 때도 밀어주고 엄마 몰래 용돈도 주셨다. 엄마랑 아빠는 사이가 좋았고 가끔 아빠가 양말을 거꾸로 뒤집어 빨래통에 넣는다며 엄마가 한 소리 할 때도 있지만 아빠는 별일 아닌 양 엄마에게 뛰어가 허리도 만지고 어깨도 만지며 입술을 내밀며 아양을 부렸다. 그게 보통의 삶이고 당연한 삶이고 사람 사는 모습은 모두 그런 거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런 내 당연했던 일상에 동수라는 존재가 끼어든 것이다. 아니 내가 동수의 삶에 끼어든 건가, 잘 모르겠다.
부모님은 누구 친척 결혼식이 있다고 시골에 가셨다. 가족 모임도 있어 새벽 일찍 출발했고 밤늦게나 도착하신다고 했다. 엄마는 계란찜을 하고 김을 썰어 두고 오징어 뭇국을 해놓고 가셨다. 자고 있는 나를 깨워 귀에 대고 밥을 꼭 챙겨 먹으라고 하셨고 볼에 뽀뽀를 하고 가셨다. 잠에서 깨서 나는 엄마가 해준 밥은 안 먹고 이틀 전에 아빠가 사 온 빵 봉지가 생각나 거기서 생크림 빵 하나를 먹었다. 뭔가 배고파 식빵도 하나 꺼내 딸기 잼을 발라 우유랑 같이 먹었다. 주방으로 가니 엄마가 끓여 놓은 오징어 뭇국 냄새가 났지만 일단 아침으로 먹기엔 빵이 더 편하고 맛있었다. 거실 소파에 누워 티브이를 켜서 만화 채널을 틀었다. 주말 아침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고 거기에 엄마 아빠도 없으니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토요일 아침 보단 일요일 아침이 볼게 더 많았지만 그래도 아무 방해 없이 누워서 티브이를 본다는 게 행복했다. 누워서 티브이 좀 보다가 게임 좀 하다가 점심 먹고는 놀이터 좀 나가서 놀아야겠다. 오늘은 토요일이니 축구공을 가지고 나가서 아파트 애들이랑 축구도 한판 할 계획이었다. 그래도 점심은 엄마가 차려 놓은 걸 먹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새벽에 엄마가 해준 뽀뽀가 생각났다. 벌써 그래도 초등학생인데 엄마는 나에게 뽀뽀를 해준다. 그렇게 빵을 먹고 누워서 티브이 좀 보다가 재밌는 게 없어 컴퓨터를 켜서 게임을 했다. 스타크래프트를 할까 포켓몬스터 게임을 할까 고민했는데 요새는 포켓몬이 더 재밌었다.
게임을 하고 있는데 집으로 전화가 왔다. 한참 재미있어서 전화를 안 받을까 했지만 자꾸 울리는 벨소리가 시끄러워 게임을 멈추고 전화를 받았다. 엄마였다. 잘 일어났냐고, 아침은 먹었냐고 물어서 솔직하게 빵을 먹었다고 했다. 엄마는 왜 빵을 먹냐고 밥을 차려놨으니 그걸 먹으라고 했다. 나는 점심엔 꼭 먹겠다고 대답했다. 엄마랑 아빠는 예식장에 도착했다고 전화 끊는다고 하면서 한번 더 나에게 밥을 잘 챙겨 먹으라고 당부했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시 서재실로 들어가 컴퓨터 책상 자리에 앉았다. 책상 의자는 아빠 키 높이로 조정되어 있어 제대로 앉으면 다리가 바닥에 닿지 않았는데 나는 그 위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게임을 했다. 그러고 등받이에 기대면 뭔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안락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어렵게 전설의 포켓몬을 잡으려는 데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일 것이었다.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점심은 잘 챙겨 먹으려고 했는데 왜 또 전화를 하는 건지 짜증이 났다. 일단 하던 걸 멈추고 다시 거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엄마 저 점심 잘 차려먹을게요"
상대 쪽에서는 답이 없었다.
"여보세요? 엄마?"
답이 없었다. 조금 기다렸지만 여전히 답이 없어 끊으려는데, “박희원”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엄마 목소리도 아니었고, 아빠 목소리도 아니었다.
“누구세요?”
“박희원” 그는 한번 더 말했다. 그걸 듣는 순간 동수 얼굴이 머리를 스쳐갔다. 동수 목소린가? 확신은 서지 않았다. 그와 대화를 해보긴 했지만 한두 번이 다였다. 그리고 그것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상대방은 “박희원!” 하고 마지막 글자에 힘을 주며 한번 더 말했다. 괜히 거실에 걸려 있는 뻐꾸기시계를 바라봤다. 차라리 엄마 전화였으면 더 반가웠을 것 같다.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었다.
“이동수?”
“응. 박희원 맞네”
“맞긴 하는데, 우리 집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고 전화한 거야?”
“선생님 책상”
“응?”
“선생님 책상에 애들 전화번호 다 있어. 책상 유리 밑에”
그 얘길 들으니 기억이 났다. 책상 위를 청소할 때 한 두 번 본 적이 있었다. 반 친구들 이름이 가나다 순으로 적혀 있고 그 옆에 집 전화번호와 주소가 적혀 있는 표였다. 동수는 그걸 보았던 것이다.
“오락실 갈래?” 동수가 말했다.
“오락실?”
“저번에 킹오브 뜨자고 했잖아. 왜? 졸았어?”
“졸긴 누가”라고 했지만 졸긴 졸았다. 게임에 질 것 같아 존 게 아니라 지금 상황에 졸아 있었다.
“그럼 지금 나와”
“어디로?”
“샤인아트 알지? 거기로 와” 동수가 과자 기계를 발로 찼던 그 문방구였다. 나에게도 익숙한 곳이었다.
“지금?”
“지금 나와. 기다린다” 하고 동수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긴 신호음이 귓가에 울렸다. 순간 뻐꾸기시계에서 뻐꾸기가 나왔다. 열한 번을 울며 정각 열 한시임을 알렸다. 뻐꾸기가 울고 찾아온 정적에 긴장감이 배어 있었다. 정적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토요일 아침의 고요였는데 전화 한 통에 상황이 달라졌다. 아니 달라진 건 내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라 그다지 나가고 싶진 않았다. 어쨌든 동수를 만나러 가야 했다. 동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가지 않으면 내가 졸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시 집에 전화할 수도 있었다. 혹시 집에 찾아올 수도 있었다. 선생님 책상의 명렬표에는 이름 옆에 전화번호, 그 옆에 주소까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동수는 어쩌면 우리 집 주소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못나 갈 이유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에 안 계시니 별다른 설명 없이 그냥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원래도 오후에는 밖에서 놀려고 했었다. 엄마가 해준 밥을 점심에는 꼭 먹으려고 했는데 그건 안될 것 같았다. 밤늦게 오신다고 했으니까 저녁 전엔 집에 와서 저녁으로 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나가야 했다.
샤인아트는 우리 집 아파트에서 10분이면 가는 곳이었고 동수네 집에서 오려면 20분은 걸리는 곳이었다. 동수는 샤인아트 건너편 인도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챙 앞쪽이 터지고 색이 바랜 빨간색 캡을 쓰고 있었다. 모자를 썼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사람이 달라 보였다. 다른 친구들이 썼으면 그냥 그랬을 텐데 동수가 모자를 쓰고 있으니, 동수도 캡을 쓰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가가자 동수는 나를 올려다보더니 “안 쫄?”이라고 하며 웃었다. 동수의 이빨은 가늘었다. 특히 잇몸에 붙어 있는 이빨 뿌리 부분이 얇았는데, 이빨이 다 있음에도 이빨 사이사이에 공간이 있어 보였다. 사이사이에 이빨 하나씩을 더 채워 넣어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그래도 개수가 부족한 건 아니었다. “졸긴”하고 내가 말했다. 그리고 나도 웃었다. 나오긴 싫었는데 막상 이 상황이 재밌었다. 그리고 동수가 반가웠다. 우리는 약속대로 오락실로 향했다. 내가 알기로 우리 동네에는 오락실이 세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내가 자주 가는 대로변 마트 옆 오락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최근에 알게 된 거지만 동수가 갔던 그 오락실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철로 옆 굴다리를 지나 시장 쪽에 있는 오락실이었다. 우리는 시장 쪽의 오락실을 가기로 했다. 거기는 동수네 집에서도, 우리 집에서도 중간 정도 위치였는데 그렇게 보면 우리는 대결의 장소를 홈도 아니고 어웨이도 아닌 제3의 장소로 정했던 것이다. 동수에게 그곳에 많이 가봤냐고 물었더니 한 두 번 밖에 안 가봤다고 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우리 둘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가고 있었다. 내 딴에는 내가 자주 가던 오락실에 가면 동네 친구들이 있을지도 몰라서 동수와 같이 노는 걸 숨기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자주 가던 오락실은 피하고 싶었다. 아직은 동수와 내가 친해지는 걸 남들에게 들키고 싶진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동수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다행히 동수도 제3 지대에 가자는 데 적극적이었다. 동수도 동수 나름의 이유가 있을 수도 있었다. 지난번에 미행할 때도 느낀 거지만 동수는 학교 안과 학교 밖에서의 모습이 조금 달랐다. 학교 안에선 고개를 숙이고 다녔고 눈빛도 흐렸지만 학교 밖에선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눈빛도 또렷했다. 학교 안에선 귀신이 떠다니듯 작은 걸음으로 높낮이 없이 걸었지만 학교 밖에선 보폭도 컸고 작게나마 팔도 휘저으며 걸었다. 말투도 그런 것 같았는데 생각해 보면 동수는 학교 안에서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말투까지 다르다고 단정 짓기는 조금 어려웠다. 물론 숱 없고 얇은 모발과 때 낀 듯 까만 손등이나 그늘진 것 같은 눈 밑, 이상하리 만치 좁은 어깨는 여전했다.
게임은 내가 이겼다. 동수는 열심히 오락기 버튼을 눌렀지만 나한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동네 형누나들과 겨뤄가며 실력을 쌓아온 나였다. 그에 비하면 동수는 그저 그랬다. 한 가지 신기했던 건 동수는 나한테 지면서도 즐거워했다는 것이다. 나는 오락에서 지면 화가 나고 게임이 하나도 재밌지가 않은데 동수는 나한테 지는데도 하나 신경질도 안 내고 활짝 웃으면서 게임을 했다. 지는 게 아쉽고, 조금만 더 하면 이길 수 있었지만, 그래도 한판 더 하자는 둥, 오히려 나를 칭찬하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열심히 오락기를 두드렸다. 내가 다섯 판 정도 이겼을 때 다른 사람이 동수 자리에 앉았고, 내가 그를 이겼고, 다시 동수가 그 자리를 이어가는 식이었다. 그렇게 동수는 열 번 정도, 그러니까 나랑 하는데 천 원을 썼고, 그다음부터는 더 이상 잇지 않았다. 대신 내가 다른 사람이랑 하는 걸 구경했다. 그렇게 나보다 형들도 세 명정도 이겼는데 나랑 또래처럼 보이는 애가 앉았다. 쉽게 이기려니 했으나 한판도 못 이기고 졌다. 세 판을 더 이어서 도전했지만 이길 수가 없었다. 내가 집중력이 떨어졌나 생각도 해봤지만 그냥 걔가 나보다 잘했다. 재밌게 하고 있었는데 진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니 기분이 별로였다. 내가 그에게 두 판째 졌을 때 동수는 다른 자리로 가서 비행기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 후로도 두 판이나 더 진 모습을 동수는 보지 못했다. 그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동수가 있는 곳으로 가서 같이 비행기 게임을 같이 했다. 비행기 게임 실력은 비슷했고 서로 대결하는 건 아니어서 같이 몇 판을 더 했다.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1시가 다된 시간이었다. 배가 고팠다. 아침에 크림빵을 먹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배 안 고프냐?” 내가 물었다.
“배고파. 라면 먹을래?”
“라면? 나 천 원 밖에 없는데”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확인했다. 정확히는 천 원짜리 한 장과 백 원 동전 두 개가 있었다.
“나 돈 있어”
“그래?” 동수가 나보다 돈이 더 많다는 것에 놀랐다. 사실 동수가 오락실 가자고 할 때부터 혹시 돈이 없는데 가자고 하는 건 아닐까 걱정도 했었다.
“내가 사줄게 가자” 그렇게 우리는 분식집에 갔다.
동수는 분식집에서 김밥 한 줄과 라면 두 개를 시켰다. 라면만 하나씩 시켜도 괜찮을 거 같은데(그렇게 시켜줄 줄 알았는데) 동수는 김밥도 한 줄 시켰다.
“너 돈 많아?” 내가 물었다.
대답 대신에 동수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나에게 보여줬다. 반에 반에 반으로 접힌 만원 짜리 다섯 장과 구겨진 오천 원짜리 한 장이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왔고 천 원짜리 두장과 백 원짜리 세 개가 왼쪽 주머니에서 나왔다. 동수는 공기 알 다섯 개를 뿌리듯 식탁 위에 지폐들을 던졌다. 지폐 들은 낡고 구겨져 있었지만 진짜 돈이었다. 큰 액수에 나는 놀랐다. 오만 칠천삼 백 원. 내가 설날 때 세뱃돈을 많이 받을 때 정도의 액수였다. 내 용돈은 한 달에 만원이었고, 지금 주머니에 있는 천이백 원이 저금통에 있는 돈을 빼면 내가 가진 돈의 전부였다. 내가 놀라는 걸 동수는 흐뭇해했다.
“너 용돈 얼만데?” 내가 다시 물었다.
“용돈? 그런 거 없어”
“근데 왜 이렇게 돈이 많아?”
“오늘 엄마 만났어”
“엄마? 엄마가 준거야?”
“응”
엄마가 준거면 용돈이지, 오늘 엄마를 만났다는 건 뭔 소리야, 너 엄마랑 따로 살아?, 등등의 질문이 입에 걸려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동수의 집에 가봤고(그 집의 상태를 봤었고), 동수 아빠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짐작에 동수는 엄마랑 같이 사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을 짐작하면서도 나는 당장에 식탁 위에 뿌려진 동수의 돈이 부러웠다. 동수를 대할 때면 그게 언제든 뭔가 일단 내가 우위에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기 전에는 혹시 오락은 동수가 더 잘하면 어떻게 하나, 싶기도 했지만 결국 오락도 내가 이겼고 결국 내가 우위에 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식탁 위에 있는 돈 때문에 나는 작아졌다. 동수도 그런 걸 바라서 식탁 위에 돈을 뿌린 건 아닐까. 그게 맞다면 그의 예상대로 나는 작아졌다. 그래도 집에 있는 내 저금통에는 칠만 원이 넘는 돈이 있었다. 그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저금통 얘기도 할까 말까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지폐가 구겨지고 구겨진 게 자꾸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김밥과 라면은 정말 맛있었다. 분식집 아줌마의 솜씨가 좋은 것 같기도 했고 배가 많이 고프기도 했다. 동수랑 나는 라면을 흡입했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밥을 먹었다. 계산은 동수가 했다.
나랑 동수는 다시 오락실로 향했다. 배만 고프지 않았다면 아직까지도 오락실에 있었을 것이다. 보통 오락실에 가면 네다섯 시간은 기본인데 오전엔 두 시간밖에 하지 못했다. 동수는 다시 대결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오락실에 가서 각자의 게임을 했다. 나는 다시 킹오브 자리에 갔다. 혹시나 아까 나를 이겼던 그 녀석이 있으면 다시 도전해보려고 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았다. 동수는 비행기 게임을 좋아하는지 그걸 한동안 하다가 어느새 눈이 눈을 뿌리며 적을 물리치는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오락실엔 담배 냄새가 가득했고,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들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오후가 되니 오락실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인기 없는 오락기 앞엔 간혹 자리가 있기도 했지만 인기 있는 오락기에는 오락기 하나당 대여섯 명은 붙어 있었다. 그중 둘은 앉아서 게임을 셋넷은 뒤에 서서 그걸 기다리고 있었다. 나랑 동수는 어린 편이라 잠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오락은 재밌었고 시간은 담벼락을 오르는 고양이처럼 빠르게 흘렀다. 문득 엄마 아빠 생각이 났다. 밤늦게 오신다고 했으니까 저녁 정도엔 집에 가서 엄마가 해 놓은 음식을 조금이라도 먹어야 했다. 시계를 보니 다섯 시가 다돼 가고 있었다. 시야에 동수가 안 보여서 어디 있나 주변을 훑어보는 데 뒤에서 누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 부딪힌 거겠지 싶었는데 누군가 의도를 담아 어깨를 두 번 더 두드렸다. 툭툭. 뒤를 돌아보라는 식이었다. 순간 가슴이 싸했다. 높은 데서 떨어지는 놀이기구를 탄 듯 심장이 배 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보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