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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편소설 쓰는 남자 Jun 21. 2021

의적 바이러스와 홍익인간 백신

간편소설스물다섯

창궐하는 악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겠습니다.

가면을 쓴 채, 해킹으로 모든 방송 화면에 깜짝 등장한 사내가 선언했다. 나쁜 짓을 할 때의 뇌 호르몬 변화를 추적해 악인에게 특화된 자살 유도 바이러스를 만들었다는 사내는 조만간 그것을 퍼뜨리겠다고 했다. 해킹 영상을 본 세상의 반응은 [맙소사], [미친], [브라보], [해보든가]였다. 


며칠 뒤, 바이러스 감염자로 의심되는 첫 사례가 속보로 떴다. 주유소에서 중년의 여성이 자기 몸에 기름을 뿌린 뒤 불을 붙인 것이다. 호피 무늬 코트에 선글라스를 착용한 여성은 사건 발생 30분 전에 인근 백화점에서 직원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수차례 뺨을 때린 것으로 밝혀졌다.


다음 사례는 젊은 부부가 집에서 목줄과 손목을 끊어 자살한 사건인데, 옷장 속 여행가방에서 온몸에 피멍이 든 아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아내를 때려 실신시킨 남편이 베란다에서 투신하는 사건도 이어서 벌어졌다.


공분을 일으킬 만한 가해자들이 잇따라 자살하자, ‘의적 바이러스’라는 말이 핫한 유행어로 떠올랐다. 조폭, 악덕 사채업자, 부동산 전문 투기꾼, 강간범, 장기 밀매 조직원, 부패 공직자, 고액 체납 부자, 사이비 교주, 사이코패스 살인마 등등이 속속 자살하면서 의적 바이러스와 가면남에게 쏠린 세상의 관심과 인기는 점점 커졌다.


하지만 재계의 총수들이 자살하면서 주식이 폭락하고 경영난이 발생하자 분위기가 급변했다. [자살 러시, 언제까지 관망만?], [자살하면 무조건 악인인가?], [자살 유도는 명백한 테러 행위] 따위의 기사 제목이 포털 대문에 걸렸고, [의적 바이러스가 아닌 살인 바이러스]라는 의료계와 [가면남은 연쇄살인범]이라는 사법계의 주장이 힘을 얻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가면남의 해킹 영상이 다시 등장했다.


바이러스 퇴치를 원하는 분은 다음 주소로 접속하십시오.

해당 주소를 클릭하자, 바이러스 퇴치용 알약을 소개하고 복용자를 모집하는 사이트가 열렸다. 알약 복용자는 사방 10킬로미터 이내에 존재하는 자살 유도 바이러스를 모두 흡수한다는 설명과 심한 통증을 견뎌야 하고 사망할 수도 있다는 경고의 글이 눈에 띄었다.


사이트는 지원자의 숫자를 실시간으로 고지했는데, 최종 숫자는 135였다. 지원자들은 은밀하게 전달받은 알약을 가지고 가면남이 지정한 장소들로 각자 이동했다. 그들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뜻에서 ‘홍익인간 백신’으로 불리었다.


도시와 농어촌과 섬 등지에서 알약 복용 후 큰 고통을 겪다가 더러 죽기도 한 홍익인간 백신 덕분에 세상은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거룩한 135인의 희생 위에서 새 출발을 선언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흐지부지된 선언을 질타하는 가면남의 선언이 다음과 같이 뒤따랐다.


창궐하는 악으로부터 다시 세상을 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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