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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갈해리 Jan 12. 2022

한여름에 찾아온 추위

금숙씨에게 찾아온 한여름의 추위

  얼마 전부터 그녀의 몸에 뭔가 이상한 신호가 잡혔다. 8월의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이 추위를 타기 시작한 것이었다. 특히 한낮, 해가 중천에 떴을 때 가장 추위를 많이 탔다. 이를 부딪치며 덜덜 떨고 있는 그녀를 볼 때마다 사람들은, 특히 가족들은 그저 무심하게 병원에 가 보라 했다. 그러나 병원에 가 봐도 의사 선생님은 딱히 몸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단지 나이가 있으니, 갱년기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나이가 있으시니, 갱년기를 의심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갱년기 약을 처방해 드릴게요."


  약을 처방받고 와서 그녀는 그 약을 꾸준히 복용했다. 그렇지만 추위는 계속해서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는 올해 56살 양띠인, 아들 둘을 둔 가정주부이자, 엄마였다. 그녀의 일과는 새벽 5시부터 시작되어 밤 12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새벽 일찍 일어나 그녀가 하는 일은 남편과 아이들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6시가 되어 일어나 6시반에 출근하는 남편의 식사를 준비하려면, 6시반에 맞춰 밥을 지어 놓으려면 5시에 일어나 쌀을 씻고 뜸을 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매일 같은 식사를 하지 않는 남편의 식사 습관에 맞춰 매번 새로운 반찬을 식탁에 올려야 했던 그녀는 분주하게 반찬을 만들었다. 오늘은 가지볶음과 계란 프라이, 된장찌개를 식탁에 올렸다.


  6시 15분쯤 욕실에서 씻고 나온 남편이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식탁에 앉았다.


  "뭐야, 또 완숙이네. 반숙으로 하라고 몇 번을 말해?"

  "알았어요. 다음부터는 반숙으로 해놓을게요. 회사 늦겠어요. 어서 드세요."


  남편은 음식이 뭔가 못마땅한 듯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식사를 했다.


  "밥은 또 왜 이렇게 설익었어? 요리를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그는 툴툴거리다가 식사를 끝내자마자 휙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식탁에 남은 남편의 빈 밥그릇과 수저를 설거지통으로 옮겨 놓았다. 남편이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그녀는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했다. 찬 물이 손에 닿자마자 추위가 그녀에게 또 다시 엄습해 왔다. 고통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그녀가 잠시 멈춰 서 있는데, 뒤에서 남편의 말이 들려왔다.


  "나 오늘 회식이라 늦어. 밥 차리지 마."

  "알겠어요. 다녀와요."


  남편은 고통스러워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본 체 만 체한 것인지 서둘러 집을 나섰다.


  집에 남은 그녀는 이제 창문을 열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거실과 주방의 창문을 열고 먼지를 털고 청소기를 돌렸다. 그런 다음 안방을 거쳐 작은방으로 향했다. 작은방의 문을 열자마자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닥에는 벗어놓은 옷가지며 양말,심지어 빤스까지 널부러져 있었다. 다 큰 사내 둘이 쓰는 방이라 그런지 완전히 무법지대에, 미로가 따로 없었다. 그 미로를 지나 아이들이 자고 있는 이층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어릴 때에야 자고 있는 모습이 예뻐 보였지, 다 큰 사내 두 놈이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위아래로 코를 나눠서 골며 자고 있는 모습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벌써 7시가 다 됐다. 늦장 그만 부리고 출근 준비해들. 어서!"


  소리를 치며 두 녀석을 깨워 보지만, 한 놈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코 고는 소리만 더 커졌을 뿐이었다.


  "당장 못 일어나!"


  그녀가 손에 든 먼지털이의 손잡이 부분으로 두 아들을 번갈아 내려치자, 윗 침대에 자고 있던 큰 녀석이 작게 신음소리를 냈다.


  "아침엔 좀 자게 놔둬요. 어차피 난 오후 출근이라구요."

  "그래도 일찍 일어나서 아버지랑 같이 식사하면 좀 좋아? 엄마가 아침을 두 번 차려야 하니?"

  "그건 엄마가 원래 하는 일이잖아요. 아무튼 더 자게 내버려 두세요."

  "하여간..."


  그녀는 이제 아래 침대에 자고 있는 작은 아들을 흔들어 깨웠다.


  "오늘 아침에 회의 있다면서? 이러다 회사에 늦겠다."


  작은 아들은 작게 코를 골 뿐, 그녀의 재촉에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이 녀석이 진짜... 안 일어나?"


  그녀는 먼지털이 손잡이로 아들의 등짝을 후려쳤다. 그러자 작은 아들은 그제서야 웅크리고 있던 몸을 세워 일어났다.


  "지금이 몇 시인데요?"

  "7시 넘었어."

  "아 씨, 늦었네. 좀만 더 일찍 깨워주지 그랬어요? 오늘 회의 지각하겠네."

  "다 큰 놈들이 혼자서도 못 일어나?"


  작은 아들은 제 아버지처럼 혼자 궁시렁거리며 욕실로 들어가 씻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 큰 아들만이 코를 드르렁거리고 있는 작은 방에 널부러진 옷가지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다용도실에서 큰 바구니를 가져와 옷을 담고 바닥을 청소기로 밀었다. 청소기 소리가 만만치 않게 크게 들렸음에도 큰 아들 녀석은 오히려 코를 더 골아대며 깊이 잠들었다.


  그녀의 큰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반반한 외모 하나 믿고 연예인이 되고 싶다 해놓고 현재는 대학로의 작은 소극장에서 소위 이름 없는 연극배우로 살아가고 있었다. 말이 배우지, 백수나 다름 없었다. 공연이 없는 날은 스스로 끼니도 떼우지 못해 번번이 그녀에게 용돈을 타 가는 아들 녀석이었다. 그래도 엄마 마음에 아들이 배 곯는 게 안타까워 5만원씩 쥐어주곤 했는데, 갈수록 용돈 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며 자꾸 그녀에게 손을 벌렸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 생각하면서도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그녀는 아들 체면이라도 세우라고 5만원을 아들 놈 자는 사이에 지갑에 넣어주곤 했더랬다.


  반면에, 작은 아들 녀석은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외모가 잘난 제 형과 비교를 많이 당해서 그런지 외향적인 성격보다는 내성적이고 꼼꼼한 성격으로 자랐다. 학창시절에 공부를 곧잘 해서 서울 소재의 상위권 대학에 들어가 그녀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으나,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여자친구 하나 잘못 만나 학점관리를 개판으로 해놓았다. 내리 세 학기 F를 받고 학사경고까지 받은 작은 아들이었다. 그와 동시에 여자친구와도 결별하고 불쑥 군대에 입대하겠다고 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엄마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지 눈물 한 방울도, 진한 포옹조차 없이 냉정하게 훈련소로 들어가 버렸더랬다. 그 뒤 제대하고 나서는 정신을 조금 차렸는지 시험기간에 밤새도록 공부를 해서 나름 학점을 잘 받아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1년 동안 취업준비해오다 최근 경기도 소재의 중견기업에 들어가 회사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생활한 지 6개월이 넘었건만, 부모에게 용돈 한 번 내밀지 않은 무심한 자식이었다.


  그런 아들 놈들 빤스를 탁탁 털어 건조대에 널고 있으려니, 가슴이 답답해지고 속에서 천불이 날 것 같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또다시 시린 추위를 느끼고 있었다. 통풍인가? 아니면 갱년기 증상? 도대체 요즘따라 몸이 왜 자꾸 추운 걸까. 그녀는 자신의 몸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러나 얼마 전 동네 병원을 찾았을 때도 의사는 건강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 도대체 그녀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 그녀는 주변 아줌마들 사이에서 용하다고 소문난 한의원을 찾았다. 한의원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흡사 개미떼들을 보는 것 같았다.


  "여기 원장님이 그렇게 용하다지?"

  "아니 점쟁이가 따로 없더래니까."


  그녀도 아줌마들끼리 나누는 대화가 궁금해 말참견을 해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결국 마음을 접었다. 정말로 용하다면 직접 원장을 만나보면 될 일이었다.


  "김금숙 환자분, 들어 오세요."


  자신을 부르는 간호사의 뒤를 따라 원장실에 들어갔다. 원장은 약간 머리가 벗겨지고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노인이었다. 게다가 어찌나 말랐는지 피죽 한 그릇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보였다.


  "환자분, 이리 앉으세요."


  간호사의 안내에 그녀는 원장 선생 옆의 의자에 앉았다. 원장은 가냘픈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한동안 눈을 감고 맥을 집었다. 이윽고 그가 눈을 뜨고서는 혀를 쯧쯧 차며 그녀에게 말했다.


  "울화가 머리 끝까지 쌓였어. 가만 놔두면 쓰러지게 생겼네."


  원장 선생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건강검진 받아도 아무 이상 없다고 나오는데요?"

  "그럴 수 있지. 울화병은 건강검진에도 안 나오니까. 남편하고 자식들이 속을 원체 썩이는구만."


  그녀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남편과 자식들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많았다. 그렇지만 화가 많다고 갑자기 오한을 느낄 수도 있나? 그것도 한겨울도 아니고 한여름에 느끼는 추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제가 요즘 한여름인데도 추위를 많이 타거든요? 그건 어떻게 된 건지..."

  "그야 울화가 지금 몸에 꽉 차서 감기에 걸린 것처럼 으슬으슬하고 욱씬거리는 거지. 그 울화병부터 고쳐야 돼."

  "이 울화병을 어떻게 고쳐야 하나요?"

  "어떻게 고치긴. 할 말 다 하고 사는 거지."

  "네?"

  "집에서 할 말 못하고 살잖어. 화를 그때 그때 풀어 버리라구. 끙끙 싸매고 있지 말고."


  그녀는 원장실을 나와 접수대에서 계산을 하고 나서도 원장 선생의 말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화를 그때그때 풀어 버리라구. 끙끙 싸매고 있지 말고. 원장 선생의 말이 메아리가 되어 그녀의 귀에 울려 퍼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한의원에서 조제한, 울화에 좋다는 약 상자를 열어 한 팩씩 냉장고에 집어 넣으며 생각했다. 내가 그동안 집에서 할 말 못하고 살았나?


  그녀는 그녀의 일상을 떠올려 보았다. 매일 아침같이 일찍 출근하는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정신 없었고, 나이가 성인이 되었건만 아직까지도 엄마가 깨워줘야 일어나는 두 아들 녀석 때문에 허리가 휘었다. 남편은 식사를 마치면 설거지통에 그릇 가져다 놓는 법도 없었고, 아들 녀석들은 제 스스로 세탁기를 돌려본 적도 없었다. 이 집안의 세 남자들은 물 한 방울 묻히는 것도 질색팔색을 했고, 대청소라도 할라치면 다들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요즘은 남편이, 아들들이 나서서 도와준다는 집안일은 오로지 그녀 혼자의 몫이었다. 결국 문제는 그녀가 아니라, 세 남자들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울화병을 얻은 것도, 한여름에 추위를 타게 된 것도 다 세 남자들 때문이었다. 그녀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끓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날 저녁, 오전 회의에 늦었다면서 아침식사를 거르고 출근했던 작은 아들 녀석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왔다.


  "엄마, 배고파요. 밥 주세요."


  그러나 당연히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없었고, 집은 오래된 폐가처럼 냉기가 서려 있었다.


  "엄마?"


  작은 아들은 안방 문을 열어 보았지만, 안방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이 아줌씨가 어디로 가셨나?"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울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늘 집안에만 계시던 엄마가 어디로 가신 거지. 그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무슨 일이야?"

  "아버지, 엄마 어디 가신 지 아세요?"

  "네 엄마야 집에 있겠지."

  "그게... 엄마가 집에 안 계시네요."

  "그럴 리가... 네 엄마가 갈 데가 어디 있어?"

  "그러게요. 저도 도통 모르겠네요..."

  "일단 알겠어. 이따 집에서 보자."

  "네..."


  작은 아들은 작은 방으로 들어가 서류가방을 자기 침대에 던져놓고는 양복에서 간편한 츄리닝으로 갈아 입었다. "아, 배고프네. 뭐 먹을 거 없나?"하고 냉장고 문을 열다가 뭔가를 발견했다. 냉장고 문에 붙어 있는 그것은 그녀의 글씨가 적힌 A4 용지였다. 종이를 들고 읽어 내려가던 작은 아들은 충격을 받은 듯 잠시 얼어붙어 있었다.


  "엄마.... 엄마!"


  그는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다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받지 않았다.


  "엄마, 전화를 안 받으시네..."


  전화로는 도저히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그녀에게 장문의 글을 남겼다.


-엄마, 갑자기 집을 나가시면 어떡해요? 아버지랑 형, 그리고 저는 어떡하라고요. '셋이서 잘 살아봐라'라뇨. 도대체 왜 그러세요? 저희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얼른 집으로 돌아 오세요.-


  작은 아들이 문자를 남긴 지 30분이 넘었어도 그녀가 읽었음을 말해주는 1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완전히 잠수를 탄 것 같았다. 작은 아들은 이제 대학로에 있을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형, 엄마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다짜고짜 시비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엄마가 가출하셨다고!"

  "그게 뭔 말이야? 엄마가 왜 가출을 하셔?"

  "그건 나도 모르겠어. 종이에다가 집 나간다고 적어놓고 나가셨다고."

  "아놔, 진짜... 엄마 왜 그러신다냐. 찾아는 봤어?"

  "아니... 엄마가 딱히 갈 만한 데가 생각이 안 나서......"

  "나 좀 이따 공연 들어가 봐야 돼. 일단 네가 찾아보고 있어."

  "알았어."


  작은 아들은 형과의 통화를 끝내고 다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자꾸 전화질이야? 회식중이라니까."

  "아버지, 아무래도 엄마가 가출하신 것 같아요..."

  "뭐? 가출?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정말이예요. 아예 집을 나간다고 종이에 써놓고 나가셨다니까요."

  "네 엄마가 무슨 가출이야? 어차피 시간 좀 지나면 들어올 거야.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봐 봐."

  "그래도... 이런 일이 없던 엄마가 갑자기 이러시니까......"

  "됐다. 이 애비 회식중이라 바쁘다. 이만 끊자."


  일방적으로 통화가 끊기고 한동안 스마트폰을 바라보던 작은 아들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다가 용기를 내어 옆집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통통한 50대 여자가 문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누구세요?"

  "아, 안녕하세요. 옆집 호영인데요. 저희 엄마 여기 오셨나 해서요..."

  "너희 엄마? 너희 엄마 우리집에 안 왔는데? 반상회 날도 아니고..."

  "아, 그런가요? (작은 소리로) 도대체 그러면 어딜 가신 거지?"

  "왜? 네 엄마가 어디 갔어?"

  "아, 아녜요. 그냥 잠깐 어디 나가셨나 봐요."

  "아까 네 엄마 한의원 갔다 오는 거 봤어. 한의원에서 한약 지어 온 모양이던데..."

  "아, 그랬군요. 감사합니다."


  작은 아들은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제일 밑 칸에 한약 팩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는 여태껏 엄마가 한 번도 아프다는 소리를 안 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얼마 전부터 자주 춥다고, 한겨울도 아닌데 이렇게 추울 수가 있냐고 세 남자에게 중얼거리며 얘기했던 게 떠올랐다. 그는 아버지와 형에게 '비상사태'라며 당장 집으로 들어오라는 문자를 보냈다.


  1시간이 지난 저녁 8시가 되어서야 아버지와 형이 집에 도착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비상사태라면서 집으로 들어오라 한 거냐?"

  "그러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엄마가 아무래도 큰 병에 걸리신 것 같아요."

  "뭐?"

  "요즘 들어 엄마가 한겨울도 아닌데 자주 춥다고 했잖아요. 그게 아무래도 별 일 아닌 게 아니었던 것 같아요. 옆집 아줌마 말로는 엄마가 한의원에 가서 한약을 지어 왔대요. 엄마가 어디 본인 약 짓는 데 돈 쓰실 분이었어요?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요. 엄마가 큰 병에 걸리셔서 지금 집에도 안 들어오고 계신 것 같아요."

  "확실해?"

  "내가 보기에는 확실한 것 같아."

  "아이고, 늙으막에 같이 귀농하려 했더만, 홀아비 되게 생겼네."

  "아버지,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직 무슨 일 일어난 것도 아니잖아요."


  세 부자는 전전긍긍하면서 그녀에게서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그녀가 갈 만한 곳이면 전부 전화를 걸어 그녀의 행방을 쫓았다. 그러나 그녀의 일가친척들도, 지인들도 그녀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면 그녀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그때,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면서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양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엄마!"

  "당신!"


  세 남자가 우르르 몰려들어 그녀에게 달려 들었다.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몸을 끌어안는 세 부자의 모습에 어리둥절해 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엄마, 암이예요?"

  "뭐?"

  "요즘 자꾸 춥다고 그러셨잖아요. 게다가 아까 한약도 지어 오셨다고 하고... 어디 큰 병에 걸리신 거예요?"

  "호영이 말이 맞아요, 엄마?"

  "그러면 그렇다고 어서 말을 해, 이 사람아!"


  그녀는 아침만 해도 까칠하고, 게으름 잔뜩 피우고, 자기밖에 모르던 세 부자가 이렇게 눈물이 글썽글썽해져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니, 오후에 한약을 냉장고에 집어넣으며 괘씸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 울화가 치밀어 아무렇게나 종이에다 자신의 속얘기를 써놓고 냉장고에 붙여놓았던 것을 가족들이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사실 장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자신의 몸이 좋지는 않아도, 세 부자가 자신의 말은 들어 쳐먹지를 않아도 남편과 자식 먹일 반찬은 매일같이 꾸준히 해 오던 그녀였다. 울화가 있으면 어떠리, 이것도 이 김금숙이 사는 방식인 것을, 하고 웃어 넘긴 그녀였다. 그런데 이렇게 세 부자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골려주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암은 아니고..."

  "그러면 뭔데?"

  "울화병이래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잘못 하다간 쓰러진다고..."

  "한의원에서 그래? 쓰러진다고?"

  "그래요."

  "그러면 여기 좀 앉아."


  남편이 그녀를 부축하며 소파에 앉혔다.


  "그래도 저녁식사 시간이 꽤 늦었는데..."

  "아냐, 당신은 쉬고 있어. 우리가 다 할 테니까."

  "그래도 되나? 요리할 줄도 모르면서..."

  "대영이, 호영이 너희 자취했었잖냐. 요리할 줄 알지?"

  "간단한 요리 정도는 할 수 있어요."

  "그럼 식탁은 내가 차릴 테니, 식사 준비는 너희가 좀 해라."

  "알겠어요."

  "아니, 그래도 세 사람이 뭘 한다고...."

  "엄마는 그냥 앉아 계세요. 저희가 할게요."


  그녀는 잠자코 소파에 앉아서 세 부자가 요리하고 식사 준비하는 것을 지켜 보았다. 평소에 게으름 피워서 그렇지, 상황이 닥치니 곧잘 해내는 세 남자였다. 큰 아들 놈은 도마 위로 야채를 썰고 있고, 작은 아들 녀석은 밥을 짓고, 남편은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 식탁에 올려 놓았다. 그녀는 속으로 이런 상황 속에 놓인 자신이 문득 행복하다고 느꼈다. 그토록 맘껏 부려 먹던 아내가, 엄마가 당장이라도 눈 앞에서 사라질 것 같은 불안감에 저렇게 사람이 바뀔 수도 있구나 하면서. 그녀는 갑자기 한여름에 찾아온 추위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추웠던 몸에 어느새 온기가 찾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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