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월생인 나는 두 개의 명칭을 가진 학교를 다녔다. 그것은 바로 국민학교와 초등학교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1996년까지는 국민학교라는 명칭으로 불리다가 1997년에 와서 초등학교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명칭 하나 바뀌었다고 뭐 달라진 게 있겠어 하겠지만, 어린 나에게는 하나의 세상이 변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것이 달라지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은 국민학교 시절의 추억에 대해서 얘기해 보기로 하겠다.
88년, 89년은 윗 세대와는 또 다른 베이비붐 세대였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커플과 부부가 많이 생겨난 것처럼 88년 서울 올림픽 때에도 커플과 부부가 많이 생겨났더랬다. 아무래도 이 정도면 스포츠와 사랑이 무슨 연관성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아무튼 그런 베이비붐 세대에 태어난 나는 1월생이라는 이유로 한 해 일찍 국민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빠른 년생이 특혜인지 핸디캡인지는 개개인마다 다르겠으나, 적어도 나는 특혜였다고 생각한다. 남들보다 일찍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는 점이나 단체생활을 일찍 경험할 수 있었다는 점이 그랬다.
95년도에 입학한 나는 50명 넘는 반 친구들(그것도 오전반 수업과 오후반 수업으로 나뉜)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교실에는 7, 8살짜리 아이들로 바글바글했더랬다. 처음에 나는 학교라는 단체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새로운 환경에 많이 불안해했던 것 같다. 그 일화로 빵 사건을 들 수 있겠다.
하루는 친구 녀석이 빵을 간식으로 싸 가지고 왔는데, 그게 먹고 싶어 나도 좀 달라했다. 그런데 친구는 자기만 먹을 거라면서 그 빵을 자기 가방에 숨겨놓았더랬다. 나는 체육시간에 교실에 몰래 들어와 친구의 가방을 열고 친구의 빵을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그런데 그때 하필이면 다른 친구들에게 발각되어 선생님에게 불려 가 혼이 나게 된 것이다. 그때 얼마나 간을 졸였던지 지금 다시 떠올려봐도 심장이 쫄깃했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이후 나는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반항을 한답시고 하루 학교를 빼먹었는데, 어른들께 혼이 날까 두려운 마음에 동네 쌀집에 숨었더랬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배는 고파오고 날은 저물어서 결국 집으로 돌아갔더니, 엄마와 아빠가 왜 학교에 가지 않았냐 꾸중을 하시면서 회초리를 드셨다. 그렇게 나의 국민학교 1학년은 질풍노도(?)의 시간으로 흘러갔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아마도 나는 관심이 필요했던 것 같다. 엄마, 아빠는 일하시고, 어린 나이에 학교에 적응하기가 힘들었고, 선생님은 엄하기만 하셨다. 내가 의지할 곳은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그때 흔들리던 나를 단단히 붙잡아준 것은 '까치 글짓기'라는 그룹과외였다. 엄마는 글쓰기를 배워둬야 한다며 동네 아이들이 과외하는 데 나를 넣어 주셨다. 나는 그 과외에서 글짓기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고, '까치 글짓기'는 내가 지금까지 글을 써오는 데 있어서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1학년의 반항기가 끝나고 2학년부터는 조금씩 학교생활에 적응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실바닥은 나무로 된 마룻바닥이었고, 겨울에는 교실마다 기름 난로를 사용했다.
나무로 된 마룻바닥은 평소에는 표면이 거칠어서 왁스칠을 해줘야 했는데, 선생님은 종례시간에 가정통신문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집에서 왁스를 가져오라고 했다. 다음날 청소시간이 되자, 2학년 전체가 미끌거리는 왁스를 묻힌 걸레로 나무 바닥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누가 더 반질반질하게 바닥을 닦는지 친구들과 내기하기도 하고, 왁스를 친구의 얼굴에 묻히면서 놀기도 했다. (위험한 행동이지만) 잘못해서 입에 들어가 켁켁거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한편, 기름난로는 교실 중앙에 놓여 있었다. 긴 배기통이 교실 천장을 가로질러 난로 위까지 연결되어 있었는데, 아이들이 매달리면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위태롭게 보였다. 그리고 기름 난로의 단점이기는 하겠지만, 한겨울 난로 주변에 앉은 아이들은 열기가 너무 뜨거워 화상을 입기도 하는 반면, 난로에서 먼 곳에 앉은 아이들은 열기가 미치지 않아 추위에 덜덜 떨기도 하고 심하면 저체온증에 걸리기도 했다.
한편, 주번들은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기름이 가득 찬 기름통을 운반해서 난로에 긴 깔때기로 기름을 주입했는데, 깔때기가 기름을 쭈욱 빨아들이는 게 신기해 보여 주번을 하겠다고 자청한 적도 있었다. 물론 기름통이 너무 무거워 친구들과 나눠 들었지만 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8, 9살 나이의 아이들이 힘이 있으면 얼마나 있을까 싶은데, 그때는 당연히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무거운 기름통을 들고 청소시간에 공들여 왁스칠을 했더랬다. 요즘 그렇게 했다가는 학부모들이 득달같이 들고일어나지 않을까 싶다.
그 외에도 우유 당번이 있어 매일 우유 박스를 운반해와서 아이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는데, 우유 당번을 맡으면 좋았던 점은 우유가 남았을 때 혼자서 독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에게는 우유를 다 나눠줬다고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고선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국민학교 시절은 이랬다. 그 외에도 학예회 때 얼굴에 분칠을 하고 꼭두각시 공연을 했던 기억, 귀신이 나온다는 낡은 화장실 칸으로 들어가 담력 테스트를 했던 기억, 아이들과 땅따먹기 하느라 해가 저문지도 모르고 하루 종일 놀았던 기억 등 국민학교에 대한 추억은 나를 활동적이고 붙임성 좋은 아이로 성장하게 해 주었다. 다음 해 3학년이 되고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면서 나는 경험 많고 원숙했던 당시 담임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조금은 의젓해졌고, 문예반으로 뽑혀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국민학생이던 시절의 나는 매일매일이 즐거웠고 다음 날이면 또 새로운 일들을 꿈꿨던 참 아이다운 아이였다. 그때는 무슨 일만 일어나도 까르르 웃음폭탄이 터지곤 했는데, 지금은 어느덧 빛바랜 현실을 자각해가고 있는 무뚝뚝한 30대 중반의 아저씨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때의 무지갯빛 추억들이 내 안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한, 남은 50여 년의 세월도 힘을 내 완주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국민학교의 추억을 새삼 떠올리며 이만 글을 마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