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맛에 살지~

by 해피영희

‘난 왜 이렇게 잘 하는 게 없지? 이것저것 해 보겠다고 하는 건 많은데 뚜렷하게 남는 것도 없고.’

또 알 수 없는 이 악마 같은 우울함이 찾아왔습니다. 아무리 너는 아니라고 거부해도 악착같이 나에게 달라붙습니다. 하루에 수십 번 파이팅을 외치고 잘할 수 있다고 세뇌를 하지만 작은 틈만 나면 스물 스물 올라옵니다.


원래 인간은 태생적으로 이렇게 연약한 동물인 건지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 생겨 먹은 건지 궁금해집니다.

어제도 바쁜 하루였습니다. 퇴근하고 돌아와 빨리 운동을 마치고 추석이 끝나면 시작하는 야간상담 활동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있었습니다.


빠른 샤워를 하고 줌 회의에 참석하여 열심히 눈 총총 빛내며 자료도 확인하고 웃으며 손을 흔들고 인터넷을 빠져나왔습니다. 조용한 집안에 홀로 어제 읽다 남은 10페이지 책을 읽었습니다. 이리 알차게 보낸 시간인데 도대체 왜 이런 감정 따위가 나를 흔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요즘은 제법 객관화라는 것을 하는지라 그런 제 모습이 인지가 되었다는 게 대단하다면 대단한 겁니다. 정말 미래에 대한 불안이 올라왔습니다.

‘내가 세운 계획들을 잘 이룰 수 있을까?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될까?’

자꾸만 몸이 책상 위를 엎드리고 한숨을 쉬고 있습니다.


남편이 퇴근을 해서 돌아옵니다. “왜 이렇게 힘이 없어?”

“그러게, 이유 없이 내가 바보 같고 우울해”

“ㅋㅋㅋ, 또 왜? 당신 잘하고 있어”

어설픈 농담을 담은 남편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10시가 되자 서울에서 재수학원을 다니는 아들이 전화가 옵니다.

눈이 반짝하며 얼른 전화기를 집어듭니다.

“엄마, 이제 학원 마쳤어. 진성이가 백신 맞으러 울산 갔거든. 그러니까 집 생각이 나네. 헉헉~”

휴대폰 너머 서울 도심의 차 소리, 교통정리를 하는 호루라기 소리, 열심히 걷느라 헉헉거리는 아들의 숨소리가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준아~ 보고 싶다. 엄마가 오늘 너무 우울했는데 네 목소리 들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왜? 우울해? 참, 엄마. 나 오늘 그런 생각을 잠시 했어.

엄마가 나를 키워주는 건 원래 그런 거다 했는데 이렇게 재수를 시켜주는 건 좀 미안하다.

아들이 꼭 성공해서 다음에 엄마에게 갚아줘야겠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 아들이 갚아주려면 한참 시간이 많이 걸릴 거야.”


아, 순간 눈물이 핑 돕니다. 아들은 현재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부담을 안기며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올 초 정말 굳은 결심과 뚜렷한 목표를 보여 주었기에 부모로서 그 기회를 지지해주고 싶었습니다.

그 옛날 대학 시절 영어교육이 전공이었던 내가 어학연수가 가고 싶었지만 경제적 이유로 포기했던 아쉬움을 내 자식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간다고 무조건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어쩌면 작년보다 더 나쁜 성적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저 짧은 순간 저런 감정을 느꼈다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겁니다.


조금 전 우울하던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냥 행복합니다.

감정이란 게 이리 실체가 없으면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합니다.

“준아, 너 지금 이 말로 엄마 우울하던 기분이 다 사라져 버렸어.

우리 아들, 너무 고맙다.

다른 거 없어, 건강 조심하고 잘 먹어야 돼. 알았지?

그런데 엄마 이거 녹음해도 되냐? ㅋㅋㅋ”


아들과의 통화가 끝나고 나니 문득 허기가 느껴집니다. 너무 바빠 저녁을 제대로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자각됩니다. 우유를 한잔 마시고 달콤한 복숭아를 입안에 넣습니다.

달콤하고 향긋한 과즙이 입안 한가득 차오릅니다.

“음~ 맛있다~ 내가 이 맛에 사는 거야. 힘들어도 이래서 버티는 거야 ~”

“헐~ 이렇게 냉큼 달라지는 거야?”


그럼 더 이상 뭐가 있겠습니까? 내 새끼가 감사하다는데 그럼 된 거죠. 충분히 인생의 파도를 맞이해 가며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거죠. 찌르찌르 풀벌레 소리가 점점 짙어가는 초가을 밤입니다.

두 손을 깍지 모으며 입술을 꼭 다 물며 결심합니다. “음~ 인생 이까짓 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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