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C의 시선
“아시는 분은 다 아실” 명작 “프린세스 브라이드(The Princess Bride)”는 소설가 겸 극작가인 윌리엄 골드먼(William Goldman)이 1973년 발표했던 동명의 판타지 소설을 배우이자 감독인 롭 라이너(Rob Reiner)가 연출해 1987년 개봉된 영화입니다. “판타지 모험 코미디”라고 불릴 만큼 여러 장르가 혼합되어 있다는 특징뿐 아니라 영화의 구성 자체가 “극중극(Play within a play)” 형식을 띄고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 측면으로, 원작 소설은 작가인 골드먼이 자신의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읽어 주던 재미있는 모험 이야기 책을 자기 아들도 읽게 하려고 생일 선물로 보내 주었지만 아들이 첫 장을 읽은 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아 의아스러운 마음을 갖게 되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이유를 알아 내려 ‘난생 처음’ 직접 책을 읽어 본 작가는 S. 모겐스턴(S. Morgenstern)이라는 사람이 쓴 그 책이 사실은 난해하고 지루한 정치 풍자물이며 어린 시절 자기가 재미있게 들었던 내용은 아버지가 책 속의 일부분을 아이 수준에 맞게 바꾸고 확장시킨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데, 그래서 작가도 자신이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편집해 새롭게 저술하게 된 소설이 바로 “프린세스 브라이드: 윌리엄 골드먼이 재미있는 부분만 편집한 버전(Princess Bride: The "Good Parts" Version, Abridged by William Goldman)”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설정은 모두 허구의 내용들로, 작가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읽어 준 원본 소설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책이 아니고 모겐스턴이라는 저자 역시 가상의 인물일 뿐입니다. “윌리엄 골드먼”이라는 본인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소설 속 작가는 실제 골드먼을 ‘대리’하는 존재(persona/author surrogate)로 설정된 인물인데, 사실은 딸만 둘인 – 아들이 없는 – 골드먼이 두 딸의 어린 시절, 각각 “공주(princesses) 이야기”를 해 달라는 아이와 “신부(brides) 이야기”를 해 달라는 아이의 요구에 맞춰 두 가지가 ‘결합’된 스토리를 꾸미면서 그 안에 등장하는 나라 이름과 주인공 이름들을 창작했다고 하지요. 이처럼 기발하고 창의적인 발상의 주인공인 작가 윌리엄 골드먼은 저희가 작년 10월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의 죽음을 추모하며 올린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의 각본을 썼던 작가이기도 합니다.
2년 전쯤 저희가 포스팅한 “엄마는 해결사(Throw Momma from the Train)”라는 제목의 영화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Sleepless in Seatle)” 같은 유명 작품에 배우로 출연했던 롭 라이너는, 성장 드라마로 분류되는 “스탠 바이 미(Stand by Me),” 로맨틱 코미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When Harry Met Sally…),” 심리 스릴러 “미저리(Misery),” 그리고 군사 법정 드라마 – 역시 저희가 비슷한 시기에 다룬 – “어 퓨 굿 맨(A Few Good Men)” 등의 뛰어난 작품들에서 감독과 배우의 역할을 동시에 담당했던 놀라운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이처럼 저희가 좋아하는 다수의 영화들에 출연하거나 연출을 맡았던 롭 라이너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며 이 작품의 영화평을 준비하는 동안 한국 배우 안성기 씨의 별세 소식도 전해 듣게 되었는데,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라 이 작품을 먼저 올리고 다음 회에는 안성기 배우를 추모하기 위해 그분의 작품도 다시 다루어 볼 예정입니다.
작가 골드먼이 아들 생일에 책을 보내 주는 것으로 원작 소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면, 영화의 경우는 감기 몸살로 앓고 있던 손자를 방문한 할아버지가 책 한 권을 가져가 읽어 주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책을 읽어 주는 동안 할아버지와 손자가 대화를 주고 받는 모습이 전체 내용 사이사이에 등장하면서 할아버지가 읽어 주는 책 속의 스토리도 함께 전개되는 “극중극”의 구성이 완성되는 것이지요. 스포츠 게임 같은 오락에만 관심 있는 어린 손자가 처음에는 ‘고색창연’한 옛날 이야기인 – 게다가 ‘유치한’ 사랑 이야기인 – 책의 내용을 굳이 듣고 싶지 않아 마뜩잖은 반응을 보이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조금씩 스토리에 빠져 들며 할아버지가 한 번씩 “그만 읽을까?” 하는 식으로 장난스레 의사를 묻을 때마다 점점 그 반응이 적극적인 관심 쪽으로 바뀌어 갑니다. 책 속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난 후에는 할아버지에게 다시 와서 책을 한 번 더 읽어 주실 수 있는지 물어 볼 정도로 말이지요.
책 속 이야기의 시대적, 지리적 배경은 중세 유럽의 가상 왕국 “플로린(Florin)”으로, 시골 농장의 농장주 딸인 “버터컵(Buttercup)”과 그녀를 좋아하는 농장 일꾼 “웨슬리(Westley)”가 남녀 주인공입니다. 웨슬리를 볼 때마다 이름도 없는 사람 대하듯 “일꾼(farm boy)”이라는 호칭으로만 부르던 버터컵은 자신이 무엇을 시키든 “원하시는 대로(As you wish)”라고 대답하는 그의 태도를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런 그의 대답이 자신에 대한 사랑 표현임을 깨닫게 되면서 그를 향한 그녀의 사랑도 싹트기 시작합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점차 깊이를 더할 즈음 가진 것 없는 웨슬리는 결혼 자금을 모으려 먼 나라에 다녀오기로 결심하는데, 그의 안전을 걱정하는 버터컵에게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웨슬리가 타고 떠났던 배가 “무시무시한 해적 로버츠(Dread Pirate Roberts)”의 공격을 받게 되면서, 그 역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채 5년이라는 시간이 흐릅니다.
그런 5년 후 버터컵은 플로린의 왕자 “험퍼딩크(Humperdinck)”와 약혼을 하게 되지만, 악하고 야비한 심성의 험퍼딩크가 사랑하지도 않는 평민 출신 버터컵과 결혼을 하려는 데에는 숨겨진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를 비밀리에 살해한 후 자신들과 원수지간인 상대 국가 “길더(Guilder)”의 소행으로 몰아 그 나라와의 전쟁을 촉발하려는 간계 말이지요(‘의도적 전쟁 유발’이라는 대목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곧바로 떠오르는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악인들의 행동 패턴이 이렇게 똑같을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 ‘작업’을 완수하려는 험퍼딩크가 계략에 능한 “비지니(Vizzini)”에게 명령을 내리고 비지니는 다시 검술사인 “몬토야(Montoya)”와 힘센 거인 “페직(Fezzik)”를 고용해 버터컵을 납치하지만, 그들을 뒤쫓아 온 검은 가면의 인물이 페직과 몬토야를 각자의 특기(힘과 검술)를 역이용해 물리치고 비지니는 그를 능가하는 지략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며 버터컵을 구해 냅니다.
그 검은 가면을 “무시무시한 해적 로버츠”로 여긴 버터컵은 웨슬리의 복수를 하겠다며 언덕에서 떠밀어 버리지만, 굴러떨어지는 그가 소리쳤던 “원하시는 대로”라는 말을 듣고는 그 사람이 바로 웨슬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무시무시한 로버츠”라고 불리는 해적 두목의 명칭은 특정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후계자에게 승계되는 일종의 ‘직책’이었는데, 웨슬리를 납치했던 당시의 “로버츠”가 그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두목 직을 물려 주고 은퇴하면서 웨슬리가 그 이름을 이어 받게 되었던 것이지요.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함께 도망치려던 그들을 험퍼딩크가 포위해 붙잡으려 하자 버터컵은 그가 바라던 대로 결혼해 줄 테니 웨슬리를 풀어 딜라고 사정하는데, 그런 그녀의 간청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인 험퍼딩크는 웨슬리를 자신의 심복 “루겐 백작(Count Rugen)”에게 넘겨 고문으로 고통 받게 하고 버터컵은 혼례식 날 밤 목 졸라 죽인 후 길더에 죄를 덮어씌우는 쪽으로 계획을 바꿉니다.
한편 비지니 사망 후 서로 헤어져 있던 페직과 몬토야 역시 다시 재회하면서, 어린 시절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후 복수의 일념에 사로잡혀 검술을 익혀 온 몬토야는 아버지를 살해했던 – ‘여섯 손가락’을 가진 – 사람이 바로 루겐 백작임을 알게 되면서 지체 없는 복수를 결심합니다. 수많은 병력에 둘러싸인 그와 대적하기 위해서는 검술과 지략 등 모든 면에 뛰어나던 그 ‘검은 망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몬토야는 페직과 함께 심한 고문으로 거의 죽음에 이른 웨슬리를 찾아내 “기적의 맥스(Miracle Max)”라는 치료사의 도움을 받아 소생시키고, 모두가 힘을 합해 버터컵도 험퍼딩크의 손아귀에서 구출해 냅니다. 웨슬리가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라 확신했었으나 결국 결혼식까지 치르게 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버터컵은 예상대로 나타나 준 웨슬리가 자신이 결혼 서약(“I do”라고 말하는)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결혼이 무효임을 알려 주자 기뻐서 어쩔 줄 모르지요.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게 된 몬토야가 “그토록 원하던 복수를 막상 끝내고 나니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심경을 토로하자 웨슬리가 그에게 “로버츠” 직을 물려 주면서 책 속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영화나 소설에서 종종 “사랑을 믿는다(I believe in love)”고 말하는 대사를 듣게 되는데, 이런 표현이 갖는 뉘앙스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저 역시 “사랑을 믿는” 사람들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말하는 ‘사랑’은 남녀 간의 - 아무래도 에로스(Eros)를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는 - 사랑보다는 희생과 헌신을 바탕에 둔 아가페(Agape)적 사랑(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 자신의 안위나 이해 관계보다 다수의 안전과 공공의 이익을 우선하는, 이타성이 그 핵심에 있는 사랑)이지만,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남녀 사이의 사랑도 확고한 ‘믿음’과 ‘신실’을 근간으로 할 경우 충분히 고귀하고 숭고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습니다. 평민의 위치에서 하루 아침에 왕자비로 신분이 상승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사랑하지 않는 상대와의 결혼을 목숨을 버릴 만큼의 수치로 여기면서, 자신을 생명처럼 아끼는 연인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고 반드시 구해 주러 올 것임을 한순간도 의심치 않는 버터컵을 보면서 말이지요.
버터컵이 무슨 요구를 하든 “원하시는 대로(As you wish)”로 대답하는 웨슬리의 자세도 ‘진정한’ 사랑의 의미에 대해 곱씹어 보게 합니다. 흔히들 사랑을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대로 행하기 위해 애쓰는” – 또한 원하지 않는 일들은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 마음으로 표현하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심성을 내재하게 된 인간이 그 ‘이상’을 실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남녀 간의 사랑이라면 뜨겁게 사랑하는 잠시동안 그런 자세가 견지되더라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 빛은 쉽게 퇴색되어 버리고 마니까요. 인간의 능력과 노력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울, 타인을 향해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As you wish)”라고 말할 수 있는 자세는, 스스로 창조하신 ‘일개’ 인간을 향해서도 “네가 말한 그대로 내가 하겠다; 우리말성경 (I will do the very thing you have asked)”라고 말씀(출 33:17)해 주시는 하나님의 무제한적 사랑을 흉내라도 내려고 할 때에만 비슷하게나마 따라할 수 있는 모습일 것입니다.
이 영화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목을 들을 때마다 저절로 떠올릴 “이봐, 내 이름은 이니고 몬토야다. 네가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죽을 각오를 해라(Hello, My name is Inigo Montoya. You killed my father. Prepare to die)”라고 하는, 자기 아버지를 죽인 루겐 백작에게 반복하는 몬토야의 절박하고도 유머러스한 외침이 이 영화의 명대사로 회자되고는 합니다. 열한 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접한 이후 오로지 그 살인자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며 살아온 몬토야는 끝까지 야비한 방식으로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힌 루겐과 결투하며 놀라운 정신력으로 - 또한 자기가 읊조리던 대사 그대로 - 마침내 복수를 이루어 냅니다. 하지만 그 같은 ‘필생의 목표’를 완수한 그에게 가장 먼저 찾아온 감정은 “허무하다”는(앞으로의 삶을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그런 복수는 말할 것도 없지만 아무리 우리의 눈에 가치 있어 보이는 목표라 해도 그것을 성취했을 때 갖게 되는 감정은 결국 “허무”일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표준새번역, 새번역 (What profit has a man from all his labor In which he toils under the sun?; NKJV)”라고(전 1:3)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려 본 솔로몬이 일갈했듯 세상사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까요(전 1:2). 그런 우리 삶의 본질적 ‘헛됨’과 ‘허무함’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담아 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eternity in the human heart)”의 본질을 찾아가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딸 J의 시선
작년 새해, 미국 대선 결과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걱정과 우울감이 가득한 마음으로 2025년을 맞으며 기분 전환을 위해 본 영화가 롭 라이너의 1987년 작 [프린세스 브라이드]였다. 언제나 좋아하던 작품이었지만 어둠과 증오가 무섭도록 세를 불리는 듯 보이던 당시 상황 때문인지 특히 큰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정확하게 1년 뒤, 이번에는 고인이 된 감독을 기리기 위해 다시 작품을 보는 내내 마음이 참 이상했다.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대상에게서 언제나 다정한 위로와 웃음을 선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일인 듯하다.
이 영화는 얼마 전 다루었던 [내일을 향해 쏴라]의 각본을 쓴 윌리엄 골드먼의 소설이 원작인데, 감기에 걸려 침대에 누워 지내는 어린 소년(프레드 새비지)에게 할아버지(무려 "콜롬보" 형사였던 피터 포크)가 찾아와 동명의 동화책 [프린세스 브라이드]를 읽어 준다는 설정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동화의 두 주인공은 꽃 이름과 같이 "버터컵"(로빈 라이트)이라는 이름을 가진 새침한 아가씨와 그녀의 집에서 하인처럼 일하는 청년 "웨슬리"(캐리 엘위스)로, 웨슬리를 이런저런 일로 부려 먹으며 도도하게 굴던 버터컵은 그가 자신의 심술에 말 없이 따라 주는 이유가 자기를 사랑해서임을 알게 된다. 자신 또한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버터컵이 깨달으면서 두 사람은 연인이 되지만, 가난한 웨슬리는 결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잠시 그녀의 곁을 떠나기로 한다. 연인을 기다리던 버터컵은 웨슬리가 탔던 배가 생존자를 남기지 않기로 유명한 해적 선장 "로버츠"에게 함락되었다는 비보를 듣게 되고, 절망에 빠져 식음을 전폐한 뒤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며 독백한다.
그로부터 5년 뒤, 버터컵은 그녀의 모국 플로린의 왕자 "험퍼딩크"(크리스 새런든)에 의해 왕자비로 간택된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의 결혼을 덤덤하게 받아들인 듯 보이는 그녀지만 복잡한 마음에 혼자 말을 타고 성 밖을 누비기를 반복하는데, 여느 때처럼 홀로 승마를 즐기던 어느 날 세 명의 괴한에게 납치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들의 우두머리 "비지니"(월러스 숀)는 버터컵을 살해한 뒤 플로린의 적국인 길더의 소행으로 몰아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을 유발하겠다는 계획을 꾸미고 있고, 그의 부하인 "페직"(앙드레 더 자이언트)과 "이니고"(맨디 패틴킨)는 죄 없는 여인을 살해한다는 비지니의 계획에 난색을 표하면서도 어영부영 버터컵의 납치를 돕는다.
이때 검은 옷차림에 복면까지 쓴 의문의 인물 "검은 옷을 입은 남자"(the man in black)가 그들을 뒤쫓기 시작한다. 비지니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20년간 검술을 연마한 검술의 달인 이니고, 엄청난 체격과 힘을 가진 장사 페직을 차례차례 보내 남자를 저지하려 하지만, 남자는 이니고를 검술로 이길 뿐 아니라 페직을 기절시킨 뒤 비지니마저 쓰러뜨리며 버터컵을 납치범 무리에서 빼내 오는 것에 성공한다. 그러나 자신을 웨슬리를 죽인 해적 로버츠로 의심하는 버터컵의 말을 긍정하던 의문의 남자는 그녀가 가난한 연인을 배신하고 왕자와 약혼한 것 아니냐며 조롱하기까지 하는데, 분노심으로 남자를 언덕에서 밀쳐 버렸던 버터컵은 굴러떨어지는 남자의 말투에서 웨슬리의 흔적을 발견하며 깜짝 놀란다. 결국 복면이 벗겨진 남자가 웨슬리로 밝혀지면서 두 연인은 극적으로 재회하게 된다.
서로에 대한 감정적 오해를 푼 뒤 웨슬리는 그간의 사정을 버터컵에게 설명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해적 "로버츠"의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이다. 무시무시한 악당으로 알려진 "로버츠"는 사실 ‘승계’되는 직함인 셈으로, 전대 "로버츠"가 은퇴하면 후계자가 이름과 악명을 물려받는 방식으로 그 명맥을 이어 갔다는 것이다. 그동안 로버츠 역할을 하며 부를 축적한 웨슬리는 버터컵을 데리고 도망치기 위해 온갖 난관을 뚫어 내지만 결국 뛰어난 추적자인 왕자에게 따라잡히고 만다.
수많은 병력에 둘러싸인 버터컵이 웨슬리를 지키기 위해 왕자를 따라가는 선택을 했음에도, 험퍼딩크는 웨슬리를 살려 주겠다는 약속과 달리 그를 부하인 루겐 백작(크리스토퍼 게스트)의 신종 고문 기계 실험체로 '던져 줘' 버린다. 사실 왕자 또한 버터컵을 이용할 심산이었던 것으로, 바로 그가 비지니를 고용한 장본인이며 살아 돌아온 버터컵을 결혼식 날 살해해 길더와의 전쟁을 일으킬 명분으로 삼을 계획임이 드러난다. 아무것도 모르는 버터컵이 자신을 구하러 올 웨슬리를 기다리는 동안 웨슬리는 고통을 겪다가 ‘사망한 듯’ 보이는 끔찍한 상태에까지 이른다.
이때 페직과 이니고가 재등장하는데, 이니고는 루겐 백작이 바로 자신이 그토록 찾아다니던 아버지의 원수임을 깨닫고는 새로운 열정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귀족인 루겐에게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그는 힘과 검술, 지략 등 모두에서 자신들을 이겼던 웨슬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마음 먹고 페직과 함께 웨슬리를 구해 마법사 "미라클 맥스"(빌리 크리스탈)에게 데려간다. 험퍼딩크 왕자에게 개인적 원한이 있던 맥스는 웨슬리가 왕자의 약혼녀와 사랑하는 사이라는 말에 신이 나 웨슬리를 회생시킨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웨슬리는 루겐 백작을 처단하고 버터컵을 구하기 위해 이니고와 페직과 함께 결혼식이 진행 중인 성으로 향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 영화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 ‘애정’한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 작품 중 하나이다. 롭 라이너 ‘사단’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유명 배우들의 능청스러운 연기는 물론, 저항 없이 피식 터지게 되는 재기 발랄한 대사(물론 약간의 취향 차이는 있으리라고 생각되나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좋아하는 종류의 유머다) 등등 여러 가지 매력 포인트를 들 수 있겠지만, 이 영화를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작품이 대놓고 ‘동화 같은 이야기’를 표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동화 같다"고 표현하곤 하는데, 이 작품은 아예 동화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작업에 더 가깝다. 영화 자체가 손자에게 동화를 읽어 주는 할아버지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된다는 점도 그렇지만, 이런 설정은 "극중극"의 형식을 넘어 할아버지가 ‘재미 없는 부분’을 건너 뛴다든지 어느새 몰입한 손자가 주인공들에게 닥친 위험과 불의에 슬퍼하거나 화를 내는 동안 구연이 멈춘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버터컵과 웨슬리의 서사를 진짜가 아닌 ‘판타지’의, 다시 말해 ‘창작물’의 범주에 안착시킨다. 대사와 설정에서 가끔씩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유치함(?)이나 몇몇 배우들의 과장된 코믹 연기 또한 이야기를 ‘현실’과 분리시키고 말이다. 어딘가 허술하고 단출한 소품과 의상, 연극 무대를 연상시키는 비좁은 세트들 또한 마치 아동극을 보는 것처럼 귀엽고 아기자기한, 환상이나 놀이(“make-believe”)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이렇게 영화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그러니까 노골적으로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일대기에 집중한다.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세계관 안에서는 죽음마저도 막을 수 없는 진정한 사랑(true love)이 역동적으로 살아 숨쉬고, 복수심에 20년간 칼을 갈아온 인물마저 적수에게 경탄을 느껴 예의를 갖추며, 무시무시한 체격과 위력을 자랑함에도 솜사탕처럼 폭신폭신한 내면을 가진 온화한 친구가 약자를 돕는 동안, 악인은 마땅한 처벌을 받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숭고함에 패배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골드먼이 각본을 맡았던 [내일을 향해 쏴라]가 구시대의 낭만을 쫓는 두 주인공을 다루었던 것과도 유사하게 이 작품 또한 결국은 낭만과 이상에 대한 찬가이자 러브레터인 셈이다.
실제로 이 영화의 주축은 버터컵과 웨슬리 사이의 ‘사랑’이지만, 이 사랑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연인 간의 사랑과는 그 성격이 사뭇 다르다. 둘의 애정의 서사는 무척 짧게 다루어지는데(물론 둘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단 몇 초만에 그려 내는 이 작품의 프롤로그가 영화 역사상 가장 ‘로맨틱’한 축에 속한다고 보기는 한다), 당시 최대치의 '미모'를 뽐냈던 캐리 엘위스와 이미 완성형 연기력으로 빛났던 로빈 라이트의 매력이 충분한 개연성을 만들어 내긴 하지만 어쨌든 그들 둘이 이토록 서로를 사랑하는 이유는 굳이 설명되지 않는다. 영화 내내 둘의 사랑이 어떤 ‘기정사실’처럼 작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 두 사람의 사이는 ‘열정’(passion)보다 ‘헌신’(devotion)으로 설명될 만한 관계로, 특히나 웨슬리는 몇 번 정도 현실과 타협하는 버터컵과 달리 계속해서 그녀를 위해 돌아오는 맹목적인, 어떤 면에선 아가페적 사랑이라 불릴 정도의 헌신을 보인다. 그런 만큼 이 두 주인공의 ‘사랑’마저도 현실적인 애정으로 느껴지기보다 어떤 이상, 완벽한 순수함과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번에 버터컵과 웨슬리의 서사를 지켜보면서는 둘의 관계가 절절한 갈망이나 연정이 아닌 ‘플라토닉’한 사랑으로 느껴졌는데, 여기서의 ‘플라토닉’이란 정신적 사랑(platonic love)이라는 뜻보다는 플라톤이 [심포지온]에서 사랑의 정체를 다룰 때 "홀로 온전했던 인간이 둘로 갈라지며 서로의 반쪽을 그리워하게 되었다"고 말했던 개념에 더 가깝다. 말하자면 버터컵과 웨슬리가 서로 다른 두 인물이 아닌, 한 인물이 가진 두 개의 단면이 다시 하나로 합쳐지고 싶어 하는 모습처럼 느껴졌다는 것인데, 버터컵이 실망하고 실수하는 보통의 양심이라면 웨슬리는 우리 모두의 안에 존재하지만 항상 다다를 수는 없는 이상, 숭고함과 고귀함을 숭배하며 선하고 온전한 것을 향해 손을 뻗는 희망의 영성으로 생각된다.
내 안 깊숙이 숨어 있던 인류애와 이타심, 세상을 위하고 선을 위해 나아가는 힘을 처음 발견하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만큼이나 황홀한 일이다. 하지만 그 마음은 세상의 차가움과 타인의 악의에 의해 너무나 쉽게 상처 받고, 마치 영영 사라진 것처럼 우리 곁을 떠날 때가 많다. 그럼에도 몇 번이나 죽음에 이를 뻔한 웨슬리가 계속해서 버터컵에서 되돌아오는 것, 그들 사이의 ‘진정한 사랑’의 힘을 믿는 웨슬리의 확신을 통해 버터컵이 감화되는 것처럼, 세상을 사랑하고 우리 안의 선을 믿는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강인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우리가 희망과 숭고함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할 타인과의 교감을 통해서뿐일 것이다. 바다에서 붙잡혔던 웨슬리를 해적 로버츠가 살려 주었고, 죽음에 가까워진 웨슬리를 회생시켜 버터컵에게 돌려 보내는 인물들이 - 의외로 - 이니고와 페직, 맥스였듯 말이다. 이들 각각이 개인적이면서 약간은 이기적인 이유로 웨슬리를 돕는다는 사실 또한 재미있는 부분인데, 우리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세상에 대한 연민과 애정,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열정을 회복시키는 데에는 대단하게 선한 이유나 목적이 필요하지 않다는 시사로도 읽혀진다.
작년 새해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웨슬리를 살피던 맥스가 그를 “거의 죽은 것일 뿐”(“only mostly dead”)이라고 설명하는 장면에서 눈물이 터졌던 일이 기억난다. “거의 죽었다는 말은 조금은 살아있다는 말”(“mostly dead is slightly alive”)이라는 대사가 그 당시 암울해 보이던 사회 상황 속에서 비관적인 우울감에 사로잡혀 있던 나를 다시 희망 쪽으로 끌어냈기 때문이다. 선하고 좋으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들을 바라는 내 안의 의지가 세상의 악의에 치여 죽은 듯 느껴질 때라도 그 마음이 여전히 조금은 살아 숨쉬고 있다는 확신을 잃지 않으려 한다.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삶이란 부족하고 겁 많은 나의 약한 한 단면이 나의 가장 선하고 숭고한 나머지 조각들과 끝까지 손을 놓지 않고 사랑하며 몇 번이고 재회하는 여정일 듯하다.
이런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유산으로 남길 수 있는 사람의 인생이란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 약자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과 웃음을 풍족하게 나누어 주며 인간이 가진 이타심과 숭고함을 스스로 보여 주었던 롭 라이너 감독에게 애틋한 그리움 만큼이나 큰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이 글을 준비하던 중 안성기 배우의 별세 소식을 들으며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작품에서는 물론 자신의 삶 속에서도 세상을 향한 다정함을 잃지 않았던 두 예술가를 추모하며 깊은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
* 안성기 배우의 출연작인 “라디오 스타”와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부러진 화살”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