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의 위치를 알려주는 숫자가 2에서 깜빡거리고 있었다.
하루가 아까운 가을을 걷기 위해 나는 트레킹화를 신고, 양손에는 재활용 쓰레기를 잔뜩 든 상태였다. 숫자는 6에서, 다시 8에서 깜빡깜빡... 이틀 전의 상황과 같겠구나 예감하고 왼손에 무거운 쓰레기를 바닥에 내려두었다. 이틀 전 병원에 가기 위해 나섰던 날도, 엿새 전 친구를 만나기 위해 나섰던 날도 택배기사님과 엘리베이터 이용 시간이 겹쳤더랬다. 10년을 넘게 이곳에 살면서 이렇게 자주 시간이 겹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같은 시각에 집을 나선 것도 아닌데.
엘리베이터는 15층에 들러 16층까지 올라갔다가 겨우 9층에 도착했다. 무릎을 굽혀 쓰레기를 다시 올려 들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보니 역시나 기사님이 커다란 카트와 함께 타고 계셨다. 나를 보시고 카트를 몸 쪽으로 바짝 당기는 기사님께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문을 향해 돌아섰다. (우리 아파트는 주민들이 엘리베이터에서 인사하는 문화가 잘 자리 잡혀 있다. 10여 년 전에는 그 연유로 짧게나마 방송이 된 적도 있다.) 이틀 전이나 엿새 전처럼 약속된 시간이 없었던 덕분에 여유롭게 9, 8, 7... 변하는 숫자를 보다가 이틀 전의 내가 떠올랐다.
그날은 병원 진료 예약 시간에 빠듯하게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신발을 마저 신으면서 집 앞 버스정류장의 버스 도착 정보를 보았다. 2분이 조금 안되게 남은 시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면 충분히 버스를 탈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자주 멈춰 섰고, 멈추는 층마다 오래 머물렀다. '아, 하필!' 하는 생각과 함께 짜증이 몰려왔고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네 개 층을 거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나는 기사님께 인사도 없이 바로 문쪽으로 몸을 돌려 섰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1층에 가까워지면서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정신이 들었고, 1층에 내려면서 살짝 몸을 돌려 "수고하세요." 인사를 하고 급히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오래전 보았던, 한 아파트 주민들이 택배기사님들의 엘리베이터 사용을 금지했다는 기사와 그때의 내 감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과 내가 무엇이 다른가 생각했다. 언제나 여러 사람이 탈 수 있는 이동 수단을 가지고 단지 내가 시간이 급하다는 이유로 잠시라도 짜증이 났던 내가 부끄러웠다.
버스와 동시에 정류장에 도착해서 버스에 올랐다. 자리를 잡고 앉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오디오북을 재생시켰다. 그러다 다음 정류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 생각이 흩어져 내용이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의 일에 대해, 아니 그때의 짜증에 대해 과하다 싶을 만큼 깊게 생각이 흘러내려갔다. '그러지 말자.' 싶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인 양 착각하고 주장하려는 어리석음을 품지 말자 했다. 연이어 실제로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사실은 참 다행이라 여겨졌다.
양손에 가득히 들었던 재활용 쓰레기를 처리하고 경비실 앞을 지났다. 경비실 바로 앞 큰 나뭇잎은 거의다 노랗게 변해 있었고, 산책길로 내려가는 길에 내가 좋아하는 키작은 단풍 나무는 갈색에 가까운 붉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가을을 맞이하고 보내는 일을 오십 번을 넘게 경험해도 급한 성격은 변하질 않았다. 그런 탓에 없어도 될 일을 종종 겪기도 하지만, 그 덕분에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되기도 한다. 그또한 다행이라 여기며, 걸었다.
(이미지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