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해선 모르는 사람에게 '공무원'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 '공무원=세금 도둑'이라는 세상의 인식이 부담되기 때문이다.
'하는 일 없이 월급만 받는다.'
'비생산적인 일을 하는 집단이다'
'어쩌다 동사무소(관공서)에 방문하거나 전화하면 불친절하다.'
모두 맞는 말이다. 단, 모든 사람이 제대로 일하지 않는다고 오해하진 않았으면 한다. 전부 놀면 어떻게 조직이 유지되겠는가. 다른 직장처럼 열심히 일하는 소수가 조직을 이끌어 가는 건 공무원도 똑같다. 이 논리에 따라서 다수 아닌 소수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이 엄청 몰린다. 그래서 햇살씨 당신은? 나는 소수였다. 타고난 책임감 때문에 '적당히' 내지 '배 째라'가 잘 안 됐다. '뭐 하나라도 배우자'라며 입사 후 약 10년 동안 열심히 일했다. 번아웃으로 한 차례 휴직을 했을 만큼 말이다.
"야이! 철밥통 새끼야!"
"변명 늘어놓지 마. 새끼야!"
입사 후 불법 광고물 단속 부서에서 1년 6개월 근무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새끼'였다. 세금을 오랫동안 체납해서 차량에 압류를 걸었다고 정말 욕을 많이 먹었던 그 시기. 화가 나서 몇 번이나 '욕하지 마! 인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요령 없는 신규 직원이 하는 말은 한결같았다.
"선생님! 일단 진정하시고요.... 제 말씀 좀 들어 보세요."
산전수전 다 겪은 지금이라면 좀 다르게 대응했을 것이다.
"예? 새끼요? 저는 선생님 자식이 아닙니다. 자꾸 욕하시면 전화 끊습니다."
욕설보다 힘들었던 건 이기적인 마음들과 마주하는 일이었다. 공직에 입사 후 가장 놀랐던 건 주민들의 투철한 신고 정신이었다. 안전 신고 같은 게 아니다. '남 잘 되는 건 두고 볼 수 없다'는 뭐 그런 신고다.
"지나가는 주민인데요. B가게에서 불법 간판(풍선 간판)을 거리에 내놓고 있어요. 단속 부탁해요."
전화를 받고 B가게에 가서 단속을 했다. 그러자 또 다른 전화가 걸려 왔다.
"A가게 근처에 사는 주민인데요. A가게에서 간이 테이블을 펼쳐서 장사를 하고, 만국기까지 걸어 둬서 통행에 불편을 주고 있어요. 단속해 주세요."
알고 보니 신고자는 단순 주민이 아니라 A가게와 B가게의 사장님이었다. 같은 업종에 종사하다 보니 상대방을 견제하려고 악의적으로 민원을 제기한 것이다.
서로 조금만 배려하면 얼마나 좋으랴. 불순한목적으로 제기된 민원도 어쨌든 처리해야 하니 관련 부서에 협조를 구했다. 간이 테이블은 노점상 단속 부서에, 나무에 걸린 만국기는 수목처리 부서에 연락했다. 그러자 수목처리 담당자 C가 문제를 제기했다.
"햇살씨, 만국기는 광고물이니까 우리 부서 소관은 아닌 것 같은데?"
"만국기는 광고물 아닌데요? 나무에 걸려 있기도 하고, 장비도 없어 그러니 이번 한 번만 협조 부탁 드려요."
C의 다음 말을 듣고 정말 어이가 없었다.
"만국기의 한쪽은 나무에 걸려 있지만, 다른 한쪽은 간판에 걸려 있으니 광고물 부서에서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야! 차라리 일하기 싫다고 이야기를 해!'
(이번 한 번만 협조해 달랬잖아!)
C의 말에 짜증이 났다. 민원인까지 서로 싸우는 마당에 같은 공무원마저 비협조적이면 정말 때려치우고 싶다. 업무 처리가 지연되자 A가게 사장님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빨리 처리 안 하고 뭐해요? 놀아요?"
"선생님, 다른 부서와 업무 협조 중이라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법대로 공명정대하게 하면 되지 뭔 말이 그리 많아요!"
'법대로 공명정대하게라?'
나는 판관 포청천(중국 송나라의 지방관, 유명한 판관으로 청백리로 칭송)이 아니다. 포청천처럼 무소불위의 권한이라도 가졌으면 법대로 하기 쉽다. 현실에선 법대로 안 되는 일이 정말 많다. 노점상에서 과일이나 붕어빵을 팔며 하루 벌어먹고사는 할머니가 눈에 거슬리니 단속해 달라고 하면? 누구든 난감할 것이다. 포청천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판결을 내렸을까? A가게와 B가게 사장, 공무원 C까지 작두형(법정 최고형)에 처해졌을지 모른다. 의(義)를 중시한 포청천이 이기적이고 비협조적인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았을 테니까. (당시 화났던 감정을 반영한 자의해석이니 이해하길 바란다. 쩝.)
여봐라!! 작두를 대령하라!!!
가끔 보람을 느낀 순간도 있었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병상이 부족했던 시기. 코로나에 감염되었지만 병원에 가지 못해 집에 격리된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이들을 관리(자가격리 전담 공무원)했다. '오전과 오후 한 번씩 안부 전화 겸 건강(체온) 체크, 응급 물품 및 생필품 배달 등등.' 본 업무를 병행해 가며 10명 정도 되는 자가 격리자를 관리하는 일은 꽤 힘든 일이었다.
한 번은 배정 부서의 실수로 고령의 어르신들만 배정받은 적이 있다. 귀가 어두운 어르신들이 많아 안부 전화를 하면 한두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질문도 꽤 많으셨다.
"담당자 선생! 체온계가 좀 이상타. 온도가 안 올라간다."
"할머니! 제가 설명드린 대로 30초 정도 입에 물고 계셨어요? "
"입? 아이고 우짜꼬. 난 계속 겨드랑이에 댔는데.. 물로 씻어서 다시 입에 무까?"
(헐! 겨드랑이라니!)
"안 돼요. 할머니! 물로 씻으면 고장 나니까 다시 가져다 드릴게요."
힘든 와중에 이런 재밌는 사연도 있었기에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기억에 남는 건 D할머니다. D할머니는 안부 전화를 할 때마다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지야(아저씨의 낮춤말)! 전화 줘서 고마워요."
규정에 따라 안부 전화를 했을 뿐인데 할머니는 항상 고맙다는 말을 했다.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아서인지 할머니는 병원에서 약을 수령해 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아지야! 오늘은 관절염 약 타는 날인데 대신 좀 받아 줄래요?"
"아지야! 내일은 혈압약 타는 날인데 대신 좀 받아 줄래요?"
미안함 때문인지 할머니는 통화가 끝날 무렵, 다시 고맙다는 말을 했다.
"아지야! 정말 고마워요. 고마워."
나는 병원을 들러 할머니의 약을 탔다. 약값은 총 17,000원. 약을 가지고 할머니의 집으로 가던 중 전화가 울렸다.
"아지야! 병원에 자리가 나서 갑자기 입원하기로 했어요. 우편함에 약값 넣어 둘 테니까 약 넣어 두고 가요."
할머니 집에 도착해서 우편함을 열였다. 구불구불한 글씨로 할머니가 남긴 쪽지가 있었다.
'아지야. 혼자 지내고 있는데 매일 안부 전화해 줘서 고마워요. 나는 혼자라서 아프면 겁이 나요. 고물 주우면서 하루 벌어먹고 사는데 코로나 때문에 일을 못해서 돈이 없다. 지금은 7,900원 밖에 없어서 이것만 남겨요. 나머지는 다 나으면 줄게요. 아지야. 정말 고마워요.'
목울대가 아렸다. '고맙다'는 말이 이렇게 서글픈 말이었나. 마당에서 멍멍 짖어대는 강아지가 할머니의 유일한 가족 같았다. 꾸깃꾸깃 돌돌 말린 천 원짜리 지폐에서 할머니의 고생한 흔적이 느껴졌다. 나는 7,900원을 그대로 두었다. 그리곤 할머니가 남긴 쪽지 여백에 한 줄을 남겼다.
'할머니! 코로나 꼭 이겨내시고, 고맙다는 말 남겨줘서 고맙습니다.'
할머니의 서글픈 고마움을 따뜻한 고마움으로 돌려 드리고 싶었다.
'할머니! 지금도 건강히 지내고 계신 거죠?'
10여 년 간 공무원 생활. 여전히 웃는 일 보다 화나는 일이 더 많다. '작가'라는 꿈이 생긴 요즘, 철밥통을 걷어 차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