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와 송몽규는 고종사촌이면서 같은 해에 출생한 친구이기도 합니다. 윤동주에 관해서는 시를 통하여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송몽규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몇 년 전 <동주>라는 영화를 보고나서 송몽규의 존재를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소설가 유광남이 쓴 소설 <동주와 몽규>는 고등학교 시절의 윤동주와 송몽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 <동주>는 그 이후의 활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북간도에서 1917년에 태어난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 하에서 젊은 시절을 지나고, 윤동주와 송몽규는 해방을 맞이하기 직전인 1945년 28년간의 인생을 마감당하고 사망합니다.
북간도(北間島)는 중국 둥베이(東北, 滿洲)의 지린성(吉林省)을 중심으로 랴오닝성(遼寧省)과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일대의 조선인 거주지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는 북간도(北間島) 또는 간도(間島)라고 부르지만, 중국에서는 압록강 이북지역을 서(西)間島(젠다오)로, 두만강 이북지역을 동(東)間島(젠다오)로 구분해서 부른다고 합니다. 간도라는 지명은 청나라와 조선의 중간지대로서 당시 봉금(封禁)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마치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끼어있는 섬 같은 지역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간도는 보통 북간도(동젠다오)를 가리킵니다. 북간도의 남쪽은 두만강(豆滿江)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접하고 있고 동쪽은 러시아의 연해주(沿海州)에 접하고 있습니다. 북간도는 일제에 항거하는 많은 조선인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여 오는 바람에 항일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이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용정),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를 졸업하고, 둘 다 일본 유학생활을 거칩니다. 이들은 짧은 인생의 대부분을 거의 같이 살았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문익환 목사도 이들과 소학교 동창생이라고 합니다.
소설 <동주와 몽규>는 은진중학을 다니는 동안의 소년시절을 그리고 있고, 영화 <둥주>는 그 후의 윤동주와 송몽규의 활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서시(序詩)>는 1941년에 쓴 윤동주의 대표적인 시입니다. 서시는 윤동주가 죽고 난 뒤 1948년에 발간된 유일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머리말 같은 시입니다.
<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서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윤동주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가겠다고 다짐합니다. 일제에 협력하는 것이 곧 안정된 삶을 보장받던 시대에 나의 길을 가는 일은 몸이 부서지는 험로를 스스로 선택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윤동주는 시작(詩作) 등 문학활동을 열심히 한 반면, 송몽규는 윤동주와는 달리 독립운동으로 인한 고초를 많이 겪게 됩니다. 송몽규는 윤동주와 마찬가지로 중국 지린성(吉林省) 룽징시(龍井市) 지신진(智新鎭)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습니다. 1931년 3월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를 졸업한 뒤 중국인 소학교에 6학년으로 편입해 1년을 더 다닌 뒤, 1932년 4월 룽징의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합니다. 은진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5년 4월 중국 난징(南京)으로 건너가 김구(金九)가 광복군의 무관을 양성하기 위해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中國中央陸軍軍官學校)에 설치한 한인특별반에 2기생으로 입학하여 군사 훈련을 받습니다. 그 뒤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가, 1936년 3월 산둥성(山東省) 지난(濟南)의 일본 영사관 경찰에 사로잡혀 본적지인 함경북도 웅기경찰서로 강제 송환됩니다. 8월까지 치안유지법 위반과 살인 등의 혐의로 조사를 받다가 석방되었고, 1937년 4월 룽징의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 4학년으로 편입한 뒤, 1938년 4월에는 외사촌 동생인 윤동주와 함께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습니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쿄토(京都)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합니다. 함께 유학을 떠난 윤동주는 토쿄(東京)의 릿쿄(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그 해 10월 쿄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으로 옮깁니다. 송몽규는 윤동주와 함께 쿄토에서 1943년 7월 14일 한국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일본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됩니다. 송몽규는 「재쿄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으로 기소되어, 1944년 4월 13일 쿄토 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됩니다. 함께 수감되었던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옥사하였고, 송몽규도 3월 7일 옥중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당시에 많은 조선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거나 독립운동에 참여합니다. 이성에 관심을 가지거나 문학에 심취할 시기인 사춘기에 이들은 나라의 독립을 걱정해야 하는 암울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문학도인 윤동주는 시를 썼고 송몽규는 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독립군이 됩니다. 북간도에서 서울의 연희전문학교로 진학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갈 수 있을 만큼 여유 있는 집안의 중산층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통상적인 출세를 거부하고 험하고 힘든 일에 뛰어든 것이지요.
송몽규는 이종사촌인 윤동주와는 아주 가까운 친구이기도 하지만, 윤동주와는 아주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합니다. 그의 활동이 유관순 열사나 안중근 의사처럼 도드라져 보이지는 않지만, 그 나름의 방식으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장엄하게 자신을 바칩니다. 그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지만, 안타깝게도 광복을 불과 반년정도 앞두고 세상을 떠납니다.
지금의 우리는 진정으로 광복의 세상에서 살고 있을까요? 우리의 조국은 우리의 선진들이 추구하였던 독립적이고 당당하며 행복한 국가일까요? 그들이 희생을 치를 만큼 부끄럽지 않은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독립을 외치고 목숨을 바쳤을까요? 그들을 모함하고 밀고하며 괴롭혔던 친일 앞잡이들은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반성하고 사죄하였을까요?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였나요? 결국 우리는 친일파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권력과 재물에 타협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앞에 송몽규가 나타났을 때 우리는 부끄럽지 않아야 할텐데요.
송몽규에게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滿) 이십 사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윤동주의 시 <참회록>의 일부입니다. 윤동주의 참회록은 오늘날의 우리가 더 절절하게 써야 할지 모릅니다. 나는 그들 앞에서 부끄러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