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교수님의 산문집이다. 전직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현재는 함평 『호접몽가』에서 강의하신다. 이 책보다 유명한 저서로는 『인간이 그리는 무늬』『탁월한 사유의 선택』『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등이 있다. 물론 다 읽었지만, 철학이나 인문학적 소견이 적은 나는 책 전부를 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몇 해 전 선생의 강연을 유튜브를 통해 들었던 터라 그나마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제일 먼저 읽어서 깊은 감동에 젖었던 『경계에 흐르다』 를 다시 떠올려본다.
35쪽 <배반의 출렁거림>
음악이나 미술의 세계만을 표현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음악이나 미술이라는 형식을 통해 ‘인간’을 표현할 수 있으면, 혹은 ‘인간과 세계 자체’를 표현할 수 있으면 우리는 그를 궁극적 인간의 형상을 한 ‘예술가’로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럼, 인간에 대한 체득은 어디서 오는가? ‘인간이 움직이는 동선’이나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접촉하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예술가가 인문학과 만나는 지점이다.
46쪽 <오직 혼자서 덤비는 눈빛>
개를 본다. (...) 가장 근친관계에 있을 법한 늑대의 눈은 갑자기 달라진다. 늑대의 눈에서는 뭔가 슬픈 기운이 느껴진다. 처연하다고나 할까? 매우 쓸쓸하다. 개는 따뜻하지만, 늑대는 쓸쓸하다. 개와 늑대의 눈은 왜 이토록 다른 느낌을 줄까?
개는 눈앞을 보는 것 같고, 늑대는 시선 너머를 보는 것 같다.
(...)
사자의 눈을 보자. 늑대보다 더하다. 한없이 쓸쓸한 그 눈빛에 나는 무섬증보다 사자가 지키는 그 고독의 지경으로 빨려들 것만 같다. 이제 알겠다. 강한 놈일수록 눈빛은 더 쓸쓸하고 처연하구나. 호랑이도 그러하더라. 강한 자의 눈빛은 쓸쓸하다. 쓸쓸한 눈빛은 고독에서 나온다. 고독을 감당하는 놈이라야 강하다.
64쪽 <‘읽기’와 ‘쓰기’, 그 부단한 들락거림>
우리가 읽는 그 무엇은 다른 사람이 써 놓은 것이다. 나의 ‘읽기’는 타인의 ‘쓰기’다. 이런 의미에서 ‘읽기’는 ‘쓰기’가 ‘흔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다. (...)
‘쓰기’와 ‘읽기’는 다른 두 사건이 아니라 기실은 하나의 사건이자 하나의 동작이다. 동시적 사건의 다른 두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