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얼마나 위태로운 존재일까. 사회를 유지하는 도덕과 규범은 과연 어느 선까지 우리를 보호할 수 있을까.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견해다. 정확히는 그의 여러 견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고 극도로 거부감을 느끼는 관객 중 일부는 인정하기 싫은(인정할 수 없는) 자아를 마주했다고 생각한다. 반면, 역설적으로 한 번이라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거나 혐오해 본 경험이 있는 관객, 혹은 평소 인간(자신)의 나약함과 악한 본성을 인정하고 이를 극복(순응)하고자 했던 관객은 거부감의 정도가 비교적 덜 할 것으로 짐작된다. 영화에서 살인교사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최면암시의 메커니즘이 감정의 '증폭'(혹은 해방된 자아)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사실 '살인교사'라는 표현도 100% 정확하지는 않다. 무의식 속 '자아'를 끄집어냈을 뿐, 이 과정이 '살인'이라는 결과로 이어질지는 전적으로 피최면자의 몫이다. '법적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살인이 비윤리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실행하지 않는이가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극 중 "최면으로 살인을 교사해도 피최면자가 살인을 윤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불가능하다"는 취지로 자문하는 주인공의 친구이자 정신과 의사인 '사쿠마'의 대사를 곱씹게 되는 이유다. 당신은 진심으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상태(해방)에서도, 윤리적 이유만으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실제로도 그러한) 관객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거부감을 느낄 여지는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큐어'에서 인간의 내면은 위태롭다. (영화에서는) 조금만 건드려도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이 '살인'을 저지를 정도까지 확대된다. 감독은 영화 속 가해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이들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을 뿐, 잠재적 살인자로 비춘다. (초반 세탁소 신 참고) "누구나 불씨는 있다. 아직 바람이 불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얘기하는 듯하다.
결국, 이 영화에서 느끼는 공포감의 본질은 '어제, 혹은 며칠 전까지 웃으며 인사했던 일상 속 평범한 지인'이 내 생각과 전혀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 관점에서는 '나 자신'도 결코 제외될 수 없다는 점이다. '마음속 날카로운 칼'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쉽고 간단하게, 단지 몇 마디 말을 통해 외면으로 표출되는 연출은 그런 공포감을 더욱 배가시킨다.
내용과 별개로 이 영화를 칭찬하고 싶은 부분은 사운드다. '배경음악'이나 '비명 소리', 혹은 '불쾌감을 주는 기계음' 등으로 공포감을 조성하는 보통의 호러 영화와는 사운드를 활용하는 구조가 다르고 꽤 독특하다. 예를 들어 전혀 무서울 것 같지 않은 분위기의 조용한 신에서 갑자기 '딱 한 번', 위화감이 느껴지는 발자국 소리가 크게 들린다거나, (상상일 뿐이지만) 아내가 자살한 모습을 목격한 주인공이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고통스러운 표정만 짓는 신이 대표적이다.
편집도 칭찬하고 싶다. 흡사 관객도 최면에 걸린 듯, 상상과 현실을 오가는 장면 전환이 너무 교묘해 극 중 인물이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관객도 상상(혹은 기억)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신은 병실에서 주인공이자 형사인 '타카베(배우 야쿠쇼 코지)'와 범인 '마미야(배우 하기와라 마사토)'가 대화할 때, 갑자기 비가 내리면서 분위기가 반전되는 장면이다. 날씨가 바뀌어 어두워진 병실 구석에 앉아 있는 마미야가 오히려 부각되는 순간으로, 귓가에 울리는 빗소리, 라이터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 그 물방울이 책상 아래로 흐르는 컷까지 이어지는 흐름은 감탄을 자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