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정아 Aug 20. 2018

열심히 말고 "잘" 하라는 말

평가절하되는 '열심'이란 가치에 대하여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 날 회사 내 부서로 인사를 다니며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몇 번이나 돌아온 말은 “열심히 말고 '잘'하세요”였다. 열심히는 다들 열심히 하니 별 소용이 없고 정확하게 “잘” 하라는 것이 중요하단다. 


그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다른 어떤 표현보다 그 말이 더 적확하게 들어맞는 상황이 분명히 있을 수도 있다. 나 또한 아주 오랫동안 "열심히보다 잘하자"라는 말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살았고, 정확하게, 요령 있게 일하는 것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일을 잘하지 못했다면 그동안 거쳐온 여러 직업군 중 한군데서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열심히란 말이 “요령 없이, 무턱대고”라는 뉘앙스를 띄게 되는 시점은 언제쯤일까. 고등학교 졸업 후? 첫 사회생활부터? 


생각해보면 열심히란 말이 왜 그런 의미로 쓰이는지는 의문이다. 우리는 열심히 일 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꾼 가정에서 자랐고, 그런 사람들이 일군 나라에서 자랐다. 왜 일을 못하는 사람에게 "열심히"라는 말을 쓰며 그렇게 일하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요령 없이 비효율적으로 일하는 사람에게 "일 못하네"라는 말을 포장하는 말로 "열심히"가 쓰이는 건 듣기 불편하다.


내가 다녔던 회사 중 하나는 그 분야에서 손에 꼽히는 세계적인 규모의 섬유기업이었다. 외국계 패션 브랜드, 해외공장과 긴밀하게 컨택하고 조율하며 각 시즌별 주문을 데드라인에 맞춰 진행하는 게 업무였던 그 회사는 업무량이 어마어마했다.


우리 부서는 특히 다른 팀보다 일이 많아, 아침 8시에 출근해서 밤 12시, 1시에 퇴근하는 게 일상 다반사였다. 같은 층에도 다른 부서들은 불이 꺼져 있는데, 우리 영업 1부 5~6명의 직원들만 새벽까지 남아 잔업을 처리하곤 했다.

바로 옆 영업 2부는 우리와 같은 일을 하면서 우리보다 팀원 수가 적은데도 야근이 거의 없이 매일 칼퇴근을 했다. 이제 일을 배워가는 나로선 그 부서 팀원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아침 7시 반에 출근해 저녁이 되면 나도 피곤에 절어 집에 가고 싶은데, 그들이 홀가분하게 퇴근할 때쯤 우리는 저녁을 먹고 일을 계속해야 했다. 매일매일이 데드라인을 맞추기 위한 전쟁이었다.


우리 팀장님은 성실하고 거절을 못하는 분이었다. “하는 데까지 해 볼게요.” 라며 수많은 일을 다 떠안았다. 그 업무를 밤새서라도 소화해내야 하는 건 고스란히 우리들의 몫이었다.


반면 영업 2팀의 팀장은 일이 별로 많지 않은 걸 다들 아는데도, “저희 지금 하고 있는 것도 벅차요. 그 건은 못 맡을 것 같습니다.”라고 얘기했다. 그 팀은 늘 칼퇴근을 했을뿐더러, 그 팀장은 일을 잘하기로 소문이 자자했지만, 다른 부서 직원들은 업무를 나눠갖지 않는 그 팀장을 “깍쟁이, 얌체”라고 불렀다.


우리 팀장은 “융통성이 없고, 영리하게 일하지 못해 아랫사람들을 고생시키는 너무 착한 팀장”이었을지 몰라도, 누구보다 그 분야에 열정을 갖고, 우직하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부하직원들을 다독이며 리드할 줄도 알았고, 궂은일은 더 솔선수범하는 리더였다. 그 팀장의 지휘 아래 우리는 업무량은 많았을지언정, 팀원들끼리 소통이 원활하고 손발이 척척 맞았으며 시간은 좀 걸렸지만 결국 핵심적인 부서로 거듭났다. 


내가 만약에 사업체를 차려서 직원을 구한다면, 똑똑하고 잘하는 2부 칼퇴근 팀장 같은 사람과,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1부 야근 전담 팀장 중 누구에게 일을 맡기는 게 더 믿음직스러울까? 나는 부하직원이라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늘 열심히 하고 요령 피우지 않는 우리 팀장님 같은 사람을 뽑을 것이다. 회사에는 잘하는 사람보다 열심히 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열심히는 비효율적으로 생각 없이 일하는 걸 뜻하는 게 아니다. 그건 "열심히"가 아니라 일을 못하는 것이다.


열심(熱心): 어떤 일에 온 정성을 다하여 골똘하게 힘씀, 또는 그런 마음을 뜻한다. 

전쟁 이후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됐던 대한민국이 이토록 빠르게 산업강국으로 거듭난 것은 잘하는 것 이상으로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이 인정을 받는 것 또한 열심히 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들보다 특출 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다. 미국의 초기 한인 이민자들이 비즈니스를 일구고 자식들을 아이비리그에 보내며 성공적인 이민자 롤모델이 된 것도 맡은 바 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이지, 잘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나는 사회에서도 학교에서도 '열심히 하는 것'의 가치와 가능성을 믿는다.


열심히 하면 사람의 인생이 바뀌고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모여 세상을 바꾼다.

열심히 하겠다고 할 때 “요령 없이 무턱대고 열심히만 하겠다”는 의미로 말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 말엔 당연히 정확하게 "잘" 하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열심히 하겠다는데, “열심히 말고 잘해라”라는 대답을 하면 괜히 말한 사람이 민망해진다. 뒤돌아보면 그런 말을 하는 상사들은 권위적이고 꼰대스러운 상사들이었다. 

 

리더와 상사의 화법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아는 가장 인격이 훌륭하고 존경받는 리더를 떠올려보라. 그런 사람은 초면에 "열심히 말고 잘하세요"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깊고 너그러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진정한 리더는 수많은 경험과 난관을 통해 몇 수는 앞서 파악하는 통찰력과 소통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애초에 잔소리나 군소리가 큰 긍정적 영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세상 일은 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살다 보면 재능을 뛰어넘을 정도의 노력을 쏟아붓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더 많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감동을 준다. '열심'이 없이는 효율적인 과정도, 좋은 결과도 나올 수 없다. 

의외로 한 사람이 평가되는 바탕에는 재능과 실력보다 더 중요한 것들도 많다.


노력, 열정, 성실함은 한 사람의 학력, 지능, 배경을 다 뛰어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열심히 하는 것, 성실성 같은 것은 오롯이 나의 의지만으로 성취할 수 있는 자질이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최소한 1만 시간 정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1만 시간의 법칙 또한 '재능'보다는 '열심'의 가치에 무게를 둔다.


프로듀스 101에서 “가수가 하고 싶어?”라는 말을 들었던 김소혜는, 밤새 연습을 해서 전날 독설에 가까운 말을 했던 배윤정 트레이너를 감동시키고, 그녀의 눈에 눈물까지 나게 만들었다.


춤도 노래도 많이 부족했던 그녀는 아이오아이로 데뷔하게 된다. 


101명의 소녀들 가운데 김소혜보다 실력이 뛰어난 연습생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고, 분명 김소혜보다 예쁘고 매력이 넘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 그녀를 하위권에서 데뷔조로 이끌어 준 것은 실력도 재능도 아닌 성실성, 열심히 임하는 태도였다. 편집의 힘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메이저 기획사 출신이 아닌 그녀에게 포커스를 맞춰 "성장하는 캐릭터" 에피소드로 발전하게끔 제작진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또한 오롯이 김소혜의 자질이다. 


한 사람의 재능이 너무 뛰어나서 감동을 받아 우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부족하고 서툴러도 진심으로 열심히 하면, 그걸 보는 사람의 마음에 큰 울림을 가져온다. 실력이 부족한 김소혜에게 많은 사람이 투표를 하고, 데뷔하게 한 힘은 열심히 노력하며 발전해나가는 모습에 있었다. 


열심히 하는 태도는 감동을 주고 눈물이 나게 만든다.


결국 세상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력이 다소 떨어져도 잘 풀리는 경우를 의외로 많이 볼 수 있다. 


사람은 감동을 주고 마음을 움직이는 이에게 향하게 마련이다.


나는 특출 난 재능이 없는 대신, 내게 주어지는 어떤 일이라도 열심히 하며 살아왔다. 열심히 하다 보니 실수가 줄고, 정확하고 신속해졌다. 내가 열심히 하는 것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에 써먹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열심히 하면 인정받겠지, 하는 순수한 마음과 노력을 “먹튀”하는 사람들, 더 좋은 기회를 줄 것처럼 꼬셔서 일하게 만들고는 버리는 사람들, 씁쓸한 경험이지만 그런 사람들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을 것이다.


그건 나를 이용한 사람들의 그릇이 작고 수가 얕은 것이지, 열심히 한 내 잘못만은 아니었다는 걸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나는 “열심”이란 가치를 믿고 살아갈 것이다. 


적어도 초면인 사람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내가 한 수 위인 듯 "열심히 말고 잘"이라고 말하기보단, "네, 잘 부탁드립니다, " 라며 그를 존중하고 응원하고 지켜보는 사람 쪽이 되고 싶다. 


의견이 갈릴 수 있는 이런 글을 쓰는 이유도, "그래도 잘해서 성과를 내는 게 더 중요합니다."라는 사람들 뒤에 가려진 채, 아직은 할 수 있는 게 "열심히 최선을 다 하는 것" 뿐인 사람들을 응원하기 위해서다. 열심히 하다 보면 결국엔, 다 잘 되더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떤 일을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으니까좀 더 많은 사람이 상사가 아닌 리더인 세상이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십 년 넘은 타투, 지우기로 한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