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는 J인가, P인가
어제 수영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말한다.
"엄마, 수정이가 나보고 J 래."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숙제를 먼저 한다고 하니까 J 래."
[친구와의 대화 중에서]
"너는 하고 싶은 놀이가 있으면 노는 걸 먼저 해? 숙제를 먼저 해?"
"음.. 나는 숙제를 먼저 하지."
"그럼 넌 (P가 아니라) J 야."
잘 들어보니 MBTI의 성향 중 계획적일 때 마음이 편하다는 J 성향, 계획적이지 않아도 마음이 편하다는 P 성향을 말한 거였나 보다. 계획을 지켜서 하기 싫은 숙제를 먼저 하고 논다고 하니 J 라고 한 건가 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이는 숙제를 먼저 하고 놀기는 하지만, 숙제를 정말 싫어해서 자리에 앉기까지 30분이 걸릴 정도로 숙제를 시작하기가 힘든 아이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어? 아닌데.. 우리 딸 P 아니야?ㅎ
너는 항상 먼저 놀고 싶어 하잖아?
숙제하기 엄청 싫어하잖아?"
(눈을 흘기며) 엄마~~
(나도 마음속에서는) 항상 숙제를 먼저 하고 놀고 싶은 생각이라고!!
앗,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아차 실수를 했구나 싶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딸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에 놀랐고, 대견스러웠다. 그동안 아이도 속으로는 숙제를 먼저 하고 노는 게 맞다는 걸 알고 노력하고 있었던 거였구나, 마음처럼 몸이 따라주지 않아 딸내미도 고통스러웠을 거다.
9살 인생, 이제 인생 9년 차.
놀고 싶은 게 당연한 나이다. 내가 9살 때는 집 뒤 놀이터에서 저녁 6시-7시까지 친구들과 동네 언니 오빠들과 뛰어놀다가 엄마가 집에서 "보나야, 저녁 먹으러 들어와." 하는 소리가 들리면 아쉬워하며 집으로 돌아갔었다. 그 당시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신나게 놀았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하다. 동네 친구, 언니오빠들과 함께 했던 오징어 삽 치기, 얼음 땡 놀이, 땅따먹기 놀이 등이 전부 다 재미있었다. 함께 놀며 자연스럽게 놀이의 규칙을 습득하고, 친구들과의 관계 형성도 배웠다.
그 당시 초저학년에는 숙제란 게 거의 없었다. 본격적으로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이었으니까. 요즘에는 유치원 때부터, 초 저부터 학원을 필수로 보낸다. 맞벌이 부부라 어쩔 수없이 학원 뺑뺑이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1~2군데 정도의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이 많다.
그렇다 보니 예체능 학원을 제외하고는 학원에서 숙제를 내준다. 거기에 집에서 학습지도 하게 되면 매일매일 무언가를 해야 하는 숙제가 생긴다. 우리 아이는 영어 유치원을 다녔고 연계해서 영어학원을 다니다 보니 매일 해야 하는 숙제의 양이 좀 많은 편이다. 사실 몇 년을 다녀서 익숙해졌을 법 한데 여전히 우리 아이는 느릿느릿하고 여유롭다. 이제는 이런 생각마저 엄마의 욕심이란 걸 안다.
부모가 기대하는 기대 수준과 아이가 할 수 있는 능력치는 많이 다르다. 부모의 눈높이를 아이와 같은 높이로 맞추어야 한다. 키가 작은 아이에게 말을 할 때 키 큰 어른이 허리를 낮추어 대화를 하듯, 기대의 수준도 아이의 눈높이로 전환해야만 한다. 기대 수준이 아이와 같아지면 아이도 행복하고 엄마도 행복할 수 있다.
놀이터에서 놀고 싶어 하는 아이를 위해 일주일에 1~2번은 수영 수업이 끝나고 집에 바로 오지 않고 근처의 놀이터에 들렀다가 온다. 그곳에서 우연히 같은 반 친구들을 만날 때면 아이가 어찌나 해맑은 미소로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 해맑은 미소가 내 가슴에 콕 박혀 '아 이게 행복이지' 싶은 생각이 드며 눈물이 날 때도 있다. 이렇게 좋아하는 걸 왜 못하게 했을까.
그렇지만 아이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을 알아가고, 복습하고, 기본적인 학습과정을 따라가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냥 놀기만 할 수는 없다. 매일 해야 하는 과제들을 아이에게 무리되지 않게 조정해 가며, 매일 성취의 기쁨을 누린 후에 신나게 놀 수 있게 하고자 하는 마음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래도 어제는 아이의 속 깊음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던 날이었다. 그날 따라 아침부터 아이의 학습과 생활습관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무얼 시키면 바로 하지 않고 최대한 미루고 싶어 하고, 느릿느릿 행동하며,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며 주위가 산만해 보이기도 하는 아이. 오전 내내 고민했다. 이 아이의 문제인 걸까, 상담이라도 받아야 하는 걸까. 내가 불안이 높고 걱정이 많은 엄마여서 심각하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다.
그렇게 오전 내내 고민했지만, 결론은 역시 사랑이었다.
군대 같은 각 잡힌 육아만 하는 엄마가 아니라, 사랑이 기본 바탕인 상태로 하는 육아. 육아가 일은 아니니까. 사랑만이 살길이라고 써 놓고 또다시 사랑을 잊으려 하고 있었다.
(브런치북 : 워킹맘에서 백수가 되다 참고 15화 사랑은 모든 걸 이긴다 )
내 마음에 위기가 올 때마다 글을 쓰며 다시금 아이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다. '사랑만이 전부'라는 마음으로 아이의 수영수업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이가 마침 속 깊은 말을 해주니, 역시 사람의 마음은 다 연결되어 있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여주며 아이와 소통했다. 아이가 귀여워하는 캐릭터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며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랬더니 그날은 아이가 스스로 무얼 해야 할지 물어보고, 스스로 숙제를 진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속도는 여전히 느렸지만 잔소리를 하지 않고, 오히려 응원해 주었더니 아이도 기쁜 얼굴로 숙제에 임했다.
'엄마는 사랑을 표현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거구나'
'표현하지 않으면 아이도 모른다.'
표현하는 사랑을 알게 된 아이는 점점 더 속이 깊은 아이로 변해갈 거다. 분명 8세일 때보다 9세일 때 조금 더 깊어진 아이의 모습을 보았으니, 내년에는 조금 더 깊어지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딸아, 미안하지만 엄마가 보기에 너는 J 가 되고 싶어하는 P 인거 같아. 그런데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이 엄마는 너를 사랑한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