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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Sep 08. 2023

그날의 산책

그날도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섰다. 신호등 앞에 서서 생각했다. 걷기에 정말 좋은 날씨다. 극심하게 춥거나 덥지 않으면 산책을 나올 때마다 하는 생각이다. 오늘은 걷기에 참 좋은 날씨라고. 따뜻하면 따뜻해서 좋고, 서늘하면 서늘해서 좋다. 비가 그쳐서 좋고, 눈이 녹아서 좋다. 그날은 봄이었으니,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원에 들어서서 호수 쪽으로 걸었다. 얇은 점퍼를 입고 나와 살짝 추운 감이 있었지만 걷다 보면 더워질 테니 상관없었다. 집에서 편히 있다가 굳이 산책을 나올 이유야 무궁무진하다. 배가 불러서, 몸이 찌뿌드드해서, 건강을 위해서, 뱃살이 신경 쓰여서,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아서, 답답해서, 기분이 가라앉아서, 화가 나서, 글이 안 써져서, 햇빛을 봐야 해서, 미세 먼지가 좋음이라서, 무엇보다 걷고 싶어서. 이 이유들이 다양하게 조합되어 나를 집 밖으로 밀어낸다.          

 

걷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어둑해진 사위를 조명이 드문드문 비춰주는 저녁 8시 이후다. 밤에 뿌려진 조명 빛엔 사족을 못 쓰는 내게 이 시간의 걷기는 가장 좋아하는 풍경 속을 걷는 일이다. 풍경 속의 다른 이들과 함께 걷는 일이기도 하다. 걷다가 기분이 너무 좋아질 때면 다른 산책자들의 기분을 내 마음대로 짐작해본다. 비록 힘든 하루였지만 이런 저녁을 보낼 수 있게 되어 분명 나만큼 좋을 거라고.      


그날은 마음이 답답해서 걸었다. 답답증이 일 때마다 왜 답답한지 원인을 찾아낼 순 없으니, 우선 걷고 본다. 십중팔구 걷기는 도움이 된다. 걷기가 도움이 될 정도의 증상이라면 큰일이 아니므로 원인은 찾을 필요 없다. 그래서 나는 가슴이 시리도록 공허한 날에도, 가슴이 안개로 가득 찬 듯 답답한 날에도, 걸으러 나온다. 걷다 보면 가슴은 채워지기도 비워지기도 한다. 어느 쪽으로든 나아진다.      
 

그날처럼 걷기 시작하자마자 안개가 걷히듯 답답증이 사라질 때도 있다. 걷다 보면 어차피 괜찮아질 테니 미리 알아서 괜찮아지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공원 중심부를 향해 걸었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너무 빨리 걸으면 무릎이 아프고, 너무 느리게 걸으면 흥이 안 나므로.        

   

걸을 땐 아무것도 듣지 않는다. 간혹 팟캐스트를 듣기도 하지만, 대개는 귀를 열어놓는다. 어떤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연다기보단, 머릿속에 흐르는 생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열어놓는다.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또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걸 그냥 내버려 둔다.      


열린 귓속으로는 사람들의 말소리, 바람 소리, 그리고 천을 따라 올라오는 물소리가 섞여든다. 자연스레 들리는 소리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고, 기울이지 않기도 한다. 15분쯤 걸으면 공원 중심부에 다다르고 삐죽 솟은 아파트 아래 나름 규모 있는 복합상업 공간이 보인다. 덩치 큰 건물이 불을 환하게 내뿜는 앞으로는 넓은 휴식 공간이 펼쳐져 있다. 날 좋은 오후에 나오면 이곳이 사람으로 가득해진다.     


여기부터가 본격적인 호수 산책길이다. 건물에서 쏟아져나오는 불빛에 등이 밀리듯 어둑한 호수 둘레길로 들어선다. 어둑해도 곳곳에 조명이 있고 산책을 하거나 뛰는 사람들이 있어 무섭진 않다. 공원 근처에 살아 좋은 건 밤에도 마음껏 산책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언제든 걷고 싶을 때 나오면 하루를 산책으로 마무리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가족 단위 산책자들이 나의 심리적 안전망이 되어준다.       

 

시멘트 길 끝으론 부드럽게 굴곡진 나무 데크길이 이어진다. 왼쪽엔 호수를, 오른쪽엔 작은 숲을 두고 나무를 밟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한 걸음, 한 걸음. 걷기는 결국은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고, 무엇보다 내 두 발로 나아가는 일이라서 완벽히 나에 속한다. 그래서 좋다. 걷다 보면 툭툭, 발소리도 나고, 착착, 리듬도 만들어진다. 내가 만드는 리듬에 익숙해져 걷다 보면 내 리듬 사이사이로 다른 사람의 리듬이 끼어들기도 한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산책자에게 드문 일은 아니다. 착착, 척척, 착착, 척척. 낯 모르는 이들과 앞뒤로 리듬이 엮인다.    


그날도 호수 꼭대기에 다다른 무렵부터 우리 세 명의 리듬이 엮이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여자, 나, 남자가 1열 종대로 걸으며 같은 바람을 맞고 있었다. 가벼운 발걸음의 여자 뒤를 내가 쫓았고, 내 뒤를 조급하게 들리는 남자의 발소리가 쫓았다. 나는 ‘우리 세 명’에서 떨어져나와 ‘혼자’ 걸어야겠단 생각에 머리를 굴려보았다. 속도를 늦춰 뒤처질까, 아니면 속도를 높여 달아날까.     


둘 다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결론에는 금방 다다랐다. 속도를 흥이 떨어질 만큼 늦추지 않는 이상 남자 뒤에 서서 걷는 상황만 초래할 뿐이고, 높인 속도를 끝까지 유지하지 않는 한 여자에게 따라잡힐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어떤 선택도 1열 종대를 가리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그냥 이대로 걸어야 할까, 체념 섞인 생각을 하는데 뒤에 따라오는 남자도 같은 고민 끝 같은 결론에 다다랐음이 느껴졌다. 불안정하던 남자의 발걸음이 이내 안정을 찾으며 규칙적인 척척,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호수 꼭대기를 돌았다. 키도, 다리 길이도, 보폭도 다른 세 사람이 이토록 오래 대열을 유지할 수 있다는 데 놀라며 공원 중심부를 향해 걸었다. 두 사람에게 향하던 의식도 어느새 옅어져 나는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얇은 점퍼 안엔 몸에서 피어난 더위가 맴돌았고, 나는 지퍼를 내리며 시원한 바람을 몸에 뿌렸다. 두 갈래 길이 나와 남자가 대열에서 이탈하고 나서야 우리는 각자 혼자가 되었다. 멀어지는 남자를 힐끗 보고 나선 내 걸음도 여유로워졌다.    


나는 언제부터 걸었을까. 일부러 시간을 내서 걷기 시작한 건 언제였을까. 기억을 되짚어보면 20대 중반부터였던 것 같다. 직장인이 되고 얼마 후부터. 일부러 시간을 내 걷지 않으면 걸을 일이 현격히 적어진 그때부터. 걷지 않는 날이 늘어가자 걷고 싶단 생각이 든 그때부터.     


퇴근 후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다가 네다섯 정거장 전에 내렸다. 한 시간 남짓 천천히 걸으며 나는 집에 도착하는 시간을 지연시켰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감하게 바라보았으며,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온갖 판에 박힌 사건들을 곱씹다가 잊었다. 걷는 일이 내게 위로가 되어준다는 건, 일부러 걷기 시작하면서 바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위로가 필요할 때면 걸었다. 위로가 필요한 누군가가 음악을 듣듯.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미치겠을 때 몰래 나와 걷기도 했다. 어차피 야근할 거 일은 저녁으로 미뤄두어도 됐다. 가산디지털단지역 근처에서 일할 당시 회사 근처에 아웃렛이 있었는데, 근무 시간에 나와 매장 사이사이를 하릴없는 사람처럼 걸어 다닌 적도 있다. 나만 농땡이 치는 건 아니어서 내가 자리를 비운 걸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강남역 근처에서 일할 때도 나는 자주 걸었다. 점심을 후다닥 먹고는 교보문고로 가서 매대 사이사이를 걸어 다녔고, 가끔은 강남역에서 집까지 세 시간을 걸어오기도 했다. 청담역 근처에서 일할 땐 이제 누가 봐도 나는 걷기에 푹 빠진 사람이었고, 퇴근 후 걷기는 루틴이 되었으며, 처음으로 걷기에 대한 글을 썼다.       

   

걷기를 좋아하다 보니 나는 걷는 사람이 좋고 누가 걷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다. 제인 오스틴 소설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 엘리자베스도 그녀가 걷는 사람이라 더 좋았다. 엘리자베스는 언니 제인을 간호하러 질퍽한 5킬로미터의 길을 혼자 걸어가기도 한다. 유독 좋아한 이 에피소드가 이후 여러 책에서 의미 있게 다뤄질 땐 밑줄도 좍좍 그었다.      


“교양 있는 아가씨의 범주에 안착하기를 거부하는 엘리자베스의 반항기는 그녀의 언어로 분출될 뿐만 아니라 그녀의 몸으로도 드러난다. 엘리자베스의 몸이 당대의 규범과 맺고 있는 관계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비가 온 다음 날 아침에 마차 없이 홀로 약 4.8킬로미터를 걸어 제인의 병문안을 가는 대목이다.” 

- 조선정, 『제인 오스틴의 여성적 글쓰기』, 민음사, 2012     


“이렇게 혼자 걷는 것은 독립심, 저택과 저택 사람들과 이루어진 사회적 영역을 벗어나 더 큰 세상에서 홀로 마음껏 생각을 펼쳐나가려는 마음, 곧 육체적인 동시에 정신적인 자유의 표현이다.”

- 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반비, 2017     


걷기 하면 떠오르는 구도, 순례의 이미지도 나를 걷는 삶으로 이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삶이 잘 사는 삶인지 알고 싶다는 바람이 한 걸음, 한 걸음이 된다. 걷다 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깨닫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내가 찾고 있는 것이 실은 내 안에 있어서 그것이 걷기를 통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 물론 호수 공원 한 바퀴의 걷기가 나를 대단한 깨달음으로 데려가주지는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매일의 걷기가 적어도 내가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지는 잊지 않게 해준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건, 오늘보다 나아진 내일의 나.     


걷다 보면 이유 없이 황홀한 감각이 몸에 차오르곤 하는데 그날도 그랬다. 벅찬 기쁨이 나오길 잘했다는 셀프 칭찬으로 이어졌다. 걸을수록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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