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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Aug 19. 2019

#1 영주가 좋아하는 공간, 서점

소설 연재


오픈 시간을 잘 못 알고 온 손님이 서점 밖을 서성이고 있었다. 이내 허리를 숙이고 이마에 손으로 차양막을 만들더니 서점 안을 들여다본다. 영주는 일주일에 두, 세 번 퇴근 후 양복을 입고 들르는 그 손님을 금방 알아봤다.


"안녕하세요."


느닷없이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란 남자가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영주를 확인했다. 영주의 얼굴을 알아본 남자가 급히 손을 내리고 허리를 펴고 서선 쑥스러운 듯 웃었다.


"저녁때만 오다가 이 시간엔 처음 와요."

    

영주가 말없이 미소를 짓자 남자가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점심에 출근하는 건 정말 부럽네요."


영주가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많이들 그렇게 얘기하세요.”  


띡, 띡, 띡, 띡. 영주가 비밀번호를 누르는 사이 일부러 딴 곳을 보던 남자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서점 안을 빼꼼히 들여다보는 남자의 얼굴이 보기 좋게 풀린다. 영주는 문을 완전히 젖히는 동시에 남자를 향해 말했다.  


"밤새 냄새가 좀 뱉을 거예요. 밤 냄새랑 책 냄새요. 그래도 괜찮으시면 들어와서 보세요."


영주의 말에 남자가 두 손을 살짝 흔들며 발을 뒤로 뺐다.


"아니에요. 뭐니 뭐니 해도 근무 외 시간을 방해하면 안 되죠. 나중에 다시 올게요. 그런데 오늘 날씨 정말 덥네요."


영주는 팔에 느껴지는 뜨거운 햇볕을 의식하며 남자의 마음을 고맙게 받겠다는 듯이 살짝 미소를 짓고는, 그의 말에 맞장구쳤다.


"6월인데 벌써 이렇게 덥네요.”


손님의 뒷모습을 짧게 배웅하고 나서 영주는 서점 안으로 들어섰다. 기분 좋은 느낌. 영주의 마음이 일터를 반긴다. 영주는 몸의 모든 감각이 이곳을 편안해함을 느낀다. 그녀는 더 이상 의지나 열정 같은 말에서 의미를 찾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기대야 하는 건 자기 자신을 몰아붙이기 위해 반복 사용하던 이런 말들이 아니라 몸의 감각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가 어느 공간을 좋아한다는 건 이런 의미가 되었다. 몸이 그 공간을 긍정하는가. 그 공간에선 나 자신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그 공간에선 내가 나를 소외시키지 않는가. 그 공간에선 내가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가. 이 곳, 이 서점이, 영주에겐 그런 공간이다.


그런데 덥긴 정말 더웠다. 그렇더라도 에어컨을 켜기 전 해야 할 일이 있다. 과거의 공기는 내보내고, 새 공기 받아들이기. 언제쯤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벗어나려는 노력도 욕심일까. 습관처럼 떠오른 생각이 영주의 마음을 무겁게 하지만, 영주는 습관처럼 또 적극적으로 생각을 밀어낸 후 창문을 하나씩 열었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한순간에 서점을 가득 채웠다. 영주는 손부채로 얼굴에 바람을 일으키며 서점을 둘러봤다. 오늘 그녀가 이 곳에 처음 온 손님이라면 이 곳이 마음에 들까. 이런 곳에서 소개하는 책이라면 믿고 읽을 수 있겠다고 생각할까. 손님이 서점을 신뢰하려면 서점은 어떤 모습이어야할까.  


그녀가 만약 이곳에 처음 온 손님이라면…, 역시 저 책장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을까. 넓은 벽 한 면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책장, 소설로만 가득 찬 책장. 아니다, 소설을 좋아하는 영주 같은 사람이나 좋아할 테지. 책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도 소설은 읽지 않는 사람이 꽤 많다는 걸 영주는 서점을 열고나서야 알게 되었다. 소설 비애호가들은 저 책장 근처엔 가지도 않겠지.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은 어린 시절 로망이 실현된 결과였다.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있던 초등학교 시절, 네 면이 책으로 가득 채워진 방을 갖게 해달라고 아빠를 조르곤 했다. 아빠는 그게 아무리 책이라 해도 무리하게 욕심을 부리는 건 좋지 않다며 어린 딸을 나무랐다. 어린 영주도 아빠가 떼쓰는 버릇을 고치려 일부러 엄한 표정을 짓는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그 표정이 무서워 엉엉 울다가 아빠 품에 안겨 잠에 들곤 했다.


매대에 몸을 기댄채 책장을 바라보던 영주가 몸을 돌려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 정도면 환기 끝. 영주는 늘 하던 대로 가장 오른쪽에 있는 창문부터 차례대로 닫았다. 이어서 에어컨을 켜고 음원 사이트에서 늘 듣던 음악을 틀었다. 영국 그룹 Keane의 앨범 ‘Hopes And Fears’. 2004년도에 나온 이 앨범을 영주는 작년에 처음 들었고, 듣자마자 빠져 거의 매일 듣고 있다. 가수의 나른하면서도 몽환적인 목소리가 서점을 가득 채운다. 오늘 하루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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