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머신, 아령, 빨리 끝내고 가자, 곧바로 자전거에 앉았다. 세팅 값은 가장 가벼운 단계인 1. 시간은 15분. 천천히 페달을 밟으며 휴대폰에 운동량을 기록하는데 옆자리에서 자전거를 타는 회원님이 말을 건다.
“내가...”
“...네?”
나는 하던 걸 멈추고 회원님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헬스장에서 운동할 때는 어지간해선 서로 말을 걸 일이 없다. 헬스장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PT 지도하고 있는 트레이너들의 목소리뿐이다. 두어 번 나에게 노크한 뒤에야 나는 그녀의 음성을 인지한 듯하다. 60대, 어쩌면 70대인지도 모르는 회원님이 천천히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나지막한 톤으로 말을 건다.
“내가 감기가 걸린 것이 아니고...”
“...네?”
회원님이 알 수 없는 말을 시작한다. 갑자기 감기라니, 나는 어리둥절하다. 회원님이 말을 이어간다. 몸을 들썩들썩하게 만드는 빠르고 신나는 음악에 묻히는 회원님의 말을 듣기 위해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집중해야 했다.
“내가 감기 걸린 게 아니고 비염이 있어요.”
그제야 회원님이 말하는 중간중간 훌쩍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아, 네, 괜찮아요.”
나는 미소를 짓는다. 자전거와 자전거 사이 거리는 어림잡아 1미터 정도 되는 것 같다. 나는 회원님이 훌쩍거리는 줄도 몰랐는데 회원님은 자꾸 훌쩍거리자니 바로 옆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는 내가 몹시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괜찮다’고 말하며 내가 지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회원님이 안도하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인다. 하던 일을 마무리 지은 뒤 두 손으로 핸들을 잡고 본격적으로 빠르게 페달을 밟는다. 자전거 앞 통창 밖으로는 광장이 펼쳐져 있다. 오후의 광장을 거니는 사람들의 여유로워 보이는 걸음새를 보며 생각했다. 공공장소 에티켓, 인간다움, 이런 품새.
#2. 그는 나를 못 알아봤지만 살 빠진 건 알아봤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 길이었다. 한여름 뜨거운 오후 햇살에서 벗어나기 위해 빠르게 걷는다. 방금 씻고 나왔는데 몸 안에서부터 발산하는 열이 피부 밖으로 뿜어져 나온다. 헬스장과 집이 가까운 것이 천만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헬스장이 멀리 있었다면 다이어트고, 운동이고, 진즉에 포기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단지로 이어지는 길은 성인 두 명이 지나가면 어깨가 닿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하는 좁은 길이다. 그 길 저쪽에서 사람이 걸어온다. 50미터쯤 되는 거리에도 저기서 걸어오는 사람이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한눈에 식별해버렸다.
작년까지 함께 봉사 활동하시던 분, 그 사람이 걸어온다. 길가에는 쇠붙이 울타리가 쳐져 있다. 이 울타리를 뛰어넘어 도망갔다가는 별 희한한 사람이 된다. 그 사람과 점점 가까워진다. 피할 새도 없이 일 미터까지 근접했다.
“안녕하세요.”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넨다. 그 사람도 화색을 지으며 안녕하세요,라고 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나. 그다음엔 오랜만에 봬요, 하고선 자연스럽게 헤어져야지. 완벽한 계획을 세운 나.
“누구? 누구신지?”
놀란 토끼 눈을 하고선 '이상한 여자'를 식별하려고 애쓰고 있는 그 사람. 당황하긴 나도 마찬가지.
비굴하게, 다급하게 외쳐본다.
“저예요. 저!”
조금 전까지 도망갈까, 하던 마음은 어디 가고 민망하니까 제발 빨리 알아보시라, 절박하게 얼굴을 가까이 디밀어본다.
“아! 비...”
그가 용케도 기억해 내고 있다.
“네, 맞아요. 비, 비단 구름이에요!”
아는 체 안 해도 될 뻔했어,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늦었다.
낮 기온은 35도를 넘어가고 태양은 잡아먹을 듯 이글대고 시뻘게진 생얼을 억지로 들이댄 덕에 그 사람은 나를 간신히 알아보긴 했다.
“여기 사세요?”
“네, 여기 삽니다.”
그가 대답한다.
“이사 오셨어요?”
아, 이게 아닌데, 이런 게 궁금한 게 아닌데 주저리주저리, 되는대로 말을 꺼내본다.
“여기 산지 오래됐습니다.”
우리 단지 사람이었구나, 십수 년이나 몰랐구나, 어쩜 한 번도 못 봤을까, 현대인의 단절이 피부에 와닿는다.
“어디 가세요?”
이런 걸 물으려던 게 아닌데, 더위를 확실히 먹은가 보다. 제정신이 아닌 걸 보니. 다행히 그는 성실하게 대답한다.
“근처 일 있어서 누구 좀 만나러 갑니다.”
“네, 저는 운동하고 집에 가는 길입니다. 하하하.”
(누가 물어봤냐고. 진짜 더위 먹었냐고. 왜 이러냐고.)
뻘쭘하게 서서(정확하게는 그의 길을 막고 서서는) 관심 있어 던지는 게 아닌 질문, 겉도는 근황 토크를 몇 마디 나누는 동안 머릿속이 바쁘다. 그냥 지나가게 둘걸 그랬어. 모른 척하는 게 나을 뻔했어. 괜히 바쁜 사람 붙잡고 시시콜콜 캐묻고 있는 꼴이군. 역시 다음엔 모른 척하는 게 나을 것 같군.
별안간 그 사람이 뜻밖의 말을 한다.
“살이 좀 빠지신 거 같아요.”
다이어트 중이라는 말을 나누기엔 애매한 사이. "네, 저, 뭐, 하하하" 하고 웃음으로 때운다. 살이 빠지고 있는데 "살 빠졌어?"라고 묻는 무심함이 넘치는 케이, 금비, 효자 아들도 있지만 일 년 만에 만난 그 사람은 살이 빠진 걸 알아봐 주었다!
미안해서였는지, 진짜로 살 빠진 것을 알아본 것인지 궁금하지만, 전화해서 물어볼 사이가 아니라 궁금함은 넣어 두었다. 말 수가 적고 인자한 성품, 그 사람의 “살이 좀 빠지신 거 같아요.”는 진짜가 아니었을까? 그는 빈말을 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신뢰를 주는 사람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얼음 물을 들이켜고 소파에 앉아 종아리를 주물럭거리며 뭉친 근육을 풀어주고, 발바닥을 꾹꾹 누르며 마사지하고 있는데 그 사람에게 문자가 왔다. 오랜만에 봐서 좋았다고, 건강한 모습 보아서 좋았다고,(생얼에 편한 차림으로 있어 못 알아보았다고) 다음엔 먼저 인사하겠다고.
그가 보낸 문자를 한동안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나는 이런 사람이 좋다. 순수함이 놀림받는 시대에 이런 사람들을 발견할 때마다 아직 괜찮아, 아직은. 이런 사람이 있는 세상이 아직은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