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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제영 Sep 04. 2018

나는 무엇인가?

마음언어

필자는 불교 종단이 설립한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시간씩 불교 관련 강의를 들었다.

그 인연으로 필자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숙제인 화두를 받게 되었다. 

물론 필자만이 아닌 필자가 속한 반 전체 학생이 그 화두를 받았다.

그 화두는 유독 필자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불교 강의 첫 시간, 스님은 칠판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What am I? 

나는 무엇인가?


그건 간화선의 화두였다.


그 계기로 필자는 명상을 시작했다. 

화두를 들고 3년간 짬짬이 명상을 했지만,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하기야 평생 승려 생활을 해도 찾기가 어려운 데, 매일도 아닌 짬짬이 명상을 한 필자가 답을 못 찾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필자가 그 답을 찾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다.


사실 이 화두는 불교만이 아닌 철학의 난제이기도 하다.

즉 인간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다.

그런데 ‘나는 무엇인가?’라는 화두에 답하기 어려운 구체적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나’라는 존재를 명료하게 보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전문 용어로 표현하면 ‘가치 인지 능력’이 덜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참고 :  https://brunch.co.kr/@cloudwaveccxy/1


대부분 사람은 외부 세상과 사물을 보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물론 뇌에 질병이 있어서 사물을 보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도 있다. 

그렇지만 대다수는 큰 어려움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나’가 존재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야 한다. 

그런데 아뿔싸 ‘나’는 외부 세계가 아닌 내면에 존재한다. 

그렇다, ‘나’는 내면에 존재하지, 몸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외부 세계가 아닌 내면세계로 들어가면 상황이 크게 달라진다. 

즉 사람마다 내면세계를 보는 능력은 천차만별이다. 


여기서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 전에 ‘나’와 ‘몸’과의 관계를 짚고 넘어가자. 

몸은 ‘나’가 머무는 집과 같으며, ‘나’는 아니다. 

그렇지만 몸은 나에게 매우 중요하며 소중히 돌봐야 하는 존재이다. 

이는 당신이 머무는 집을 소중히 여기며, 집을 청소하고 정돈하고 수리해야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자. 지금까지 이야기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나’가 내면에 존재하고, 내면을 보는 능력이 부족하면 ‘나’를 알 수 없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한편 불교에서는 견성(見性)을 매우 중요시한다. 

그 이유는 바로 ‘나는 무엇인가’라는 화두의 답이기 때문이다. 


견성(見性)을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마음을 보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다. 

사람마다 견성(見性)의 깊이와 넓이가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는 사람마다 가치 인지 능력 발달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존중’이라는 단어를 알아도 사람마다 ‘존중’의 깊이와 넓이가 다른 것과 비슷하다. 

어떤 사람은 머리로 아는 수준이고, 

또 어떤 이는 얕은 수준의 말과 행동으로 존중을 실천하는 이도 있다. 


‘나는 무엇일까?’의 답은 바로 ‘마음’이다.


그런데 이 글을 읽을 수 있고 단어인 ‘마음’을 안다고 해도 여전히 ‘나’를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마음’은 실체이고 존재이기에,  ‘마음’이라는 단어만으로 그리고 마음의 피상적 현상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는 ‘마음’이라는 존재를 전체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인가?’를 스스로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나의 정체성을 바로 알 때 진정한 내면 성장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참고 :  https://brunch.co.kr/@cloudwaveccxy/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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