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누군가가 당했던 피해 사실이다. 모자이크 화면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명백하게 보여주지 않으면 가해 종교 단체의 내부자들은 계속해 방어 논리를 구축한다. 그리고 이렇게 보여줘야 피해자가 한두 명이라도 빠져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선정성 논란이 일자, 기자간담회에서 당시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조성현 피디가 밝힌 입장이다.
“사이비 종교 문제는 내 가족과 친구들 중에도 피해자가 있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였고 언젠가는 해야 할 숙제와 같은 존재였다.”
조 피디의 이런고백에 덧붙이자면, 사이비 종교는 고등학생 시절 필자에게도 상흔을 남겼다.
필자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교내 기독교 동아리(당시에는 서클이라고 불렀다)에 들어갔다. 동아리 담당 선생님은 생물을 가르치셨다. 널찍한 과학실에서 예닐곱 명이 매주 한 번씩 예배드리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선생님은 성경책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성경을 읽었고, 봉급의 2할을 교회에 헌금했다. 그러니까 십일조가 아니라, 십이조를 드렸다.
한 번은 선생님 댁에 갔다. 임신한 채로 애를 돌보는 사모님은 몸이 힘들어 보였다. ‘부부가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라고 쓴 종이가 방문에 붙어 있었다. 학교에서는 물론, 가정에서도 신앙적인 모범으로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3학년이 된 어느 날, 선생님이 이단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1992년 10월 28일 휴거로 시한부 종말론 소동을 일으켰던 ‘다미선교회’가 그 이단이다. 10월이 되기 전 선생님은 학교를 사직했다.
“사탄아, 물러가라”
사직서제출을 간곡히 만류하는 동료 선생님에게이런 말을 남기고 생물 선생님은 학교를 떠났다.
풍문에 의하면, 선생님은 이혼을 하고 홍콩 어딘가로 종말을 준비하기 위해 가셨다고 한다. 신앙 좋던 남편이 이단에 빠져 엉겁결에 이혼을 당한 사모님은 얼마나 눈물 흘렸을까? 자식 둘은 어떻게 건사했을까?
모든 인간은 ‘종교적 성향이 있는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다.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성스러움을 갈망하는 인간을 두고 이렇게 주장했다.
맥락은 다르지만, 이 땅에서 펼쳐진 역사만 보더라도 종교는 삶과 더불어 이어졌다. 호국불교로서 위상을 떨치던 고려와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은 조선만 보더라도 그렇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은 전원 종교인으로 천도교 15인, 개신교 16인, 불교 2인으로 구성됐다. 이 중 손병희는 천도교 3대 교주로, 그 사위가 역시 천도교에 몸담은 소파 방정환이다. ‘어린이’라는 말 자체가 천도교에서 만든 것이다.
10월 3일(당시는 음력)을 국경일로 선포한 것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다. 원래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이라 부르며 매년 행사를 가진 종교는 독립운동가 나철이 일으켜 세운 ‘대종교(大倧敎)’다.
임시정부가 발족하면서 임시의정원 의원 중 절반 이상이 대종교인들이었고, 김좌진, 이범석을 비롯하여 청산리대첩을 이끈 북로군정서는 애초 대종교인들로 구성되었다. 이런 활약으로, 대종교가 없었으면 임시정부도 없었을 거라는 의견이 있을 정도다. 개천절이 국경일로 지정된 게 대종교인들의 공로와 무관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종교 단체로 위장한 독립운동 단체’
일제(日帝)는 이미 1915년 대종교를 이렇게 규정하고 탄압했다. 의도치 않게, 독립운동을 하는 종교 단체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들은 셈이다.
성(聖)과 속(俗)의 휘장을 가르는 ‘자기희생’은 선한 영향력을 끼친 종교의 공통분모다. 반면 사이비 종교 단체는 ‘종교 단체로 위장한 범죄 집단’이다. 이들은 자기가 아니라 타인을 희생시킨다.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마태 1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