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낮은 자세로 가장 혹독한 계절을 이기는 법
출퇴근길, 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걷다 보면 거리는 온통 무채색입니다. 잎을 다 떨군 앙상한 가로수, 회색 보도블록, 두꺼운 외투를 입은 사람들의 표정마저 얼어붙어 있는 것 같습니다. 생명력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계절, 겨울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시선을 위가 아닌 발밑으로 툭 떨어뜨려 보세요. 매일 밟고 지나가는 보도블록 틈새나 길가 화단 구석의 흙바닥을 유심히 관찰해 본 적이 있나요?
다 죽은 줄 알았던 차가운 땅 위에 여전히 초록빛을 띤 식물들이 바닥에 껌딱지처럼 납작하게 붙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줄기를 세워 당당하게 서 있는 대신, 잎을 사방으로 둥글게 펼쳐 땅바닥에 바짝 엎드린 모습. 장미꽃 모양 같다고 해서 식물학에서는 이를 로제트 식물 혹은 방석 식물이라고 부릅니다.
화려한 꽃도 없고 볼품없이 납작해진 이 식물들이 왜 겨울 산책길의 스승이냐고요? 납작함 속에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는 치열하고도 현명한 생존 전략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식물에게 줄기를 세우고 위로 자라는 것은 본능이자 자존심입니다. 그래야 더 많은 햇빛을 받고 경쟁에서 이길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겨울의 로제트 식물들은 그 자존심을 과감히 버렸습니다. 대신 땅바닥에 온몸을 밀착시키는 선택을 했습니다.
왜일까요? 생존을 위해서입니다. 겨울의 칼바람은 지면에서 조금만 떨어져도 살을 에는 듯 차갑습니다. 하지만 땅바닥은 의외로 따뜻합니다. 지구가 품고 있는 지열이 남아 있기 때문이죠. 로제트 식물들은 줄기를 포기하는 대신, 땅의 온기를 껴안는 쪽을 택했습니다.
또한, 잎을 방석처럼 넓게 펼쳐 겨울의 희미한 햇살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독차지합니다. 경쟁자들이 다 말라 죽어 사라진 겨울 땅 위에서, 그들은 낮은 자세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환경이 안 좋아서 못 해"라고 투덜대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들은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대신 환경에 맞춰 자신의 자세를 바꿉니다. 춥다면 추운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납작 엎드려서라도 기어이 살아남겠다는 의지가 경이롭지 않나요?
누군가는 바닥에 엎드린 그 모습을 보고 "초라하다", "볼품없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비굴한 굴복이 아닙니다. 다가올 봄을 위한 적극적인 준비 태세입니다.
로제트 식물들은 겨울 동안 성장을 멈춘 게 아닙니다. 겉으로는 납작 엎드려 죽은 듯 보이지만, 땅속에서는 누구보다 깊고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잎으로 가는 영양분을 아껴 뿌리에 비축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게 겨울 내내 내공을 쌓은 로제트 식물들은 봄이 오면 꽃대를 올립니다. 다른 식물들이 이제 막 씨앗에서 깨어날 때, 준비를 마친 그들은 봄의 주인공이 됩니다.
우리 인생에도 겨울이 찾아옵니다. 하던 일이 잘 안 풀리고,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찬 바람만 쌩쌩 부는 시기. 이때 우리는 억지로 괜찮은 척 고개를 꼿꼿이 세우려다 부러지곤 합니다.
인생의 겨울이 오면 로제트 식물처럼 과감하게 납작 엎드리세요. 자존심을 세우기보다 실속을 챙기세요. 화려한 성취를 보여주려 애쓰기보다 내면의 뿌리를 깊게 내리는 데 집중하세요.
"지금 내가 납작해진 건 무너진 게 아니야. 더 높이 오르기 위해 뿌리에 힘을 모으고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엎드려 있는 시간도 견딜 만해집니다. 아니, 오히려 소중해집니다.
오늘도 머리로만 감동하고 끝낼 순 없겠죠? 오늘 퇴근길이나 내일 점심 산책길에 회색빛 풍경 속에서 '초록색 로제트'를 찾아보세요. 보도블록 틈새나 가로수 밑 흙바닥을 유심히 보면 반드시 있습니다.
발견했다면 쭈그리고 앉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보세요. 그 사진을 보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주세요.
"가장 낮은 자세로 가장 강하게 버티는 중이다."
힘든 시기를 겪고 있거나 웅크리고 있는 당신에게 작은 풀 포기가 위대한 스승이 되어줄 겁니다. "나도 이렇게 버티고 있어. 너도 할 수 있어."라고 말해줄 겁니다.
지금 당신이 어딘가에 납작 엎드려 숨죽이고 있다면, 절대 기죽지 마세요. 실패한 게 아닙니다. 지금 인생의 가장 혹독한 계절을 가장 현명한 방법으로 건너가고 있는 중입니다.
로제트 식물이 봄이 되자마자 꽃대를 쑥 올리듯, 당신의 웅크림도 머지않아 놀라운 도약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뿌리는 배신하지 않으니까요.
땅의 온기를 믿고, 당신의 뿌리를 믿으세요. 당신의 봄은 이미 땅속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