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이란 지도를 펼치다
2000년대와 201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저녁이 다가오면 기대가 되었다. 모두가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같이 저녁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상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이다. 평일에 가끔씩 외식을 하기도 했고 특히나 금요일 저녁은 한 주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잠깐의 나들이 여행을 다녀오거나 야식을 먹기도 했다. MZ들이 말하는 워라밸이 과거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지인들 혹은 친구들과 약속을 잡아 술을 마시거나 놀기도 했다. 하지만 10년, 20년이 지난 지금 현실은 많이 변했다. 퇴근을 했지만 예전처럼 소비를 하기가 쉽지 않다. 가파르게 오르는 물가와 부동산 거품의 붕괴로 인해 중산층의 현실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럭셔리한 힐링의 저녁은 옛말이며 요노족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하며 소비의 패턴도 많이 바뀌었다. 물가는 오르고 글로벌 경제는 불확실하니 이러다 아나바다와 요노족의 시대가 점점 더 길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월급은 한계가 있는데 필요한 돈의 숫자는 걱정을 무시하듯 점점 커져만 간다. 요즘은 투잡, 쓰리잡 뛰는 사람들도 있는데 퇴근 이후에도 일을 하며 돈을 버는 사람들의 숫자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2000년대, 2010년대 초중반만 하더라도 투잡, 쓰리잡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지 못했는데 요즘 들어서는 투잡, 쓰리잡이 필수로 인식되는 듯 하다. 자신의 꿈과 목표를 위해 투잡, 쓰리잡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정말로 돈이 부족하거나 버티기 위해 투잡, 쓰리잡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투잡, 쓰리잡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자신의 능력을 펼쳐 나가는 사람들은 정말로 원해서 투잡, 쓰리잡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정말 버티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투잡, 쓰리잡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면 이는 분명 문제가 있다. 평일을 거의 쉬지 못하고 계속해서 일만 해야 하는 하루를 계속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대기업을 들어가면 어떨까? 대기업은 그나마 중소기업에 비해 연봉도 높고 복지도 좋아서 먹고 사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다르다. 대기업은 업무의 긴장도가 훨씬 높고 경쟁이 치열해서 그만큼 정신적으로 힘들다. 정말로 능력이 뛰어나야 승진을 할 수 있다. 능력이 곧 생존인 곳이 대기업이다. 처음 입사할 때는 기대감을 가지게 되지만 막상 들어오고 나면 이보다 숨막히는 곳이 없다. 난 우연히 대기업의 경력자 분들과 협업을 한 경험이 있었다. 확실히 덩치가 큰 기업들 그리고 중견기업들의 시니어들은 업무에 대한 집요함이 남달랐다. 평균 이상의 삶이란 저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런 분들 마저도 정작 자기 업무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었다. 업무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해서도 걱정을 했다. 분명히 업무 역량이 뛰어나신 분들이었음에도 그렇게 걱정을 한다는 게 처음에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알파의 삶, 적어도 난 평균 이상으로 뭔가를 잘하는 사람의 삶을 일컬어 알파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알파의 삶을 살아야 먹고 사는 걱정을 하지 않을 것이며 지속가능성도 기대할 수 있다고 믿었다. 현실적으로 봐도 평균 이상으로 뭔가를 잘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과거에도 알파들은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알고 지내던 알파들도 힘들다고 토로한다. 헐... 그러면 더 대단한 알파가 있다는 말인가?
알파가 되기 위해 평일이 없는 한 주를 보내며 살아갔던 지난 날들이 떠오른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쳤던 그 순간들이 결코 불필요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고생들이 쌓이고 쌓여서 알파로 살아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순간들을 알파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만 몰입한다면 과연 그 삶이 행복한 삶일까? 바쁘게 돌아가는 도심의 낮과 밤은 누군가에겐 빛나고 북적북적한 곳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무겁고 어두운 곳으로 인식될 수 있다. 소중한 일상 그리고 소중한 만남들. 평균 이상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지만 생각보다 현실은 만만하지가 않다. 오랫동안 직장을 다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충분히 박수받아 마땅하다. 매너리즘에 빠져 자신의 가치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수많은 직장인들. 그 직장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연 이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알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상위 1%, 5%의 사람들만이 아닌 자신의 삶에서 노력을 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들이 투잡, 쓰리잡을 생각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언제쯤 올 것인가.
학력 인플레이션, 욕망 인플레이션. 과거와 비교했을 때 취업의 조건은 높아졌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도 많아졌다. 참으로 역설적이다. 예전보다 인프라는 훨씬 좋아졌고 삶의 질도 분명 좋아졌는데 막상 사회에 나가서 돈을 벌며 살아가다 보면 어 이거 아닌데 하는 생각이 종종 들때가 많다. 뭐지? 내가 잘못 살아온 것인가? 아니면 원래 세상이 이런 것인가? 지금은 확실히 과거와는 다르다. 대학 들어가는 문이 엄청 좁았던 시절에는 대학만 졸업하면 무조건 취업이 됐다. 심지어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취업할 수 있었는데 당시에는 경제가 막 성장하던 시기여서 지금하고는 많이 달랐다. 사실 과거나 지금이나 대학 들어가기는 쉽지 않지만 진입장벽을 고려했을 때 지금이 훨씬 더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더 많다. 더군다나 스마트폰, OTT, 이커머스 등 삶의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굳이 밖을 나가지 않아도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모든 게 편리해지고 누릴 수 있는 것도 자연스럽게 많아졌다. 누구나 좋은 것들을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취업은 더더욱 어려워진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어떻게든 성적을 잘 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여러 활동도 많이 하고 자격증도 많이 땄다. 그렇게 하면 취업은 문제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바쁜 와중에도 짬짬이 산책을 하고 여행을 다니며 희망적인 기대감으로 하루를 살아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취업의 진입장벽은 높아져만 갔다. 알파의 삶을 꿈꾸었던 청년들은 점점 지쳐만 간다.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많은 젊은 날의 초상은 점점 어두워져만 간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까지 장장 15년에서 20년 정도를 공부하고 사회로 나온다. 그 과정에서 정작 소중한 것들을 잊어버린다. 부모와의 연락은 뜸해지고 어느새 친구들과의 연락도 줄어든다. 서로가 힘들다고 얘기하며 하루를 보내는 게 일상이 된다. 희망으로 시작해서 절망으로 끝난다. 감정적인 시행착오를 피하고 싶었지만 사실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학점을 잘 받아서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보다 학점이 낮은 친구들이 취업을 하는 것을 보면 더더욱 내 삶에 대한 의구심만 커져간다.
삶은 불확실한 것이다. 알파의 삶을 꿈꿨던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주변의 작은 것들을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다. 소중한 일상을 잊어버리고 투쟁과 경쟁으로 점철된 하루가 모여 펼쳐지는 압박감의 날들. 어떻게든 실수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아 풀리지 않았던 날들. 뒤돌아보면 그런 날들 또한 추억으로 남겠지만 알파가 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렇게 고생한 날들이 있었기에 소중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각박하고 복잡한 세상에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투잡, 쓰리잡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버티기 위해 투잡, 쓰리잡을 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의 삶을 비교했을 때 어떤 삶이 더 가치있는 삶일까? 꿈과 목표를 이루는 삶이 가치가 있을까?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 버티기 위해 사는 삶이 가치가 있을까? 질문이 잘못됐다. 가치가 없는 삶은 없다. 쓸데없는 삶도 없다. 알파의 삶을 살지 못한다고 하여 소중한 일상을 누리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미래가 어둡다고 해서 버려지는 삶이 있어야 하고 지켜야 하는 삶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삶이 불확실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불필요한 삶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누구의 삶이든 살아있고 호흡이 있으며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소중한 일상은 알파의 삶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며 비록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