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 그리고 키보드의 향연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아. 공감만 해줘!
그럼 우리의 사랑도 크게 문제 없을거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싶었다.
그게 사랑이라 생각했고
사랑의 기간을 연장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기쁨과 만족에서 시작한 사랑은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공감은 어느 순간 도달하기 힘든
하나의 목표가 돼버린 것 같았다.
차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힘썼다.
나 하나 희생하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뭔가는
어느샌가 강요로 바뀌어 있었다.
이성적인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이 움직이는 순간 사랑은 시작된다.
그렇기에 사랑의 끝은 알 수 없다.
사랑을 하고 싶었고 그랬기에
공감하는 마음도 배우고자 했다.
서로가 마음에 들어 시작한 사랑이지만
알맹이가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정서적인 교감이 오고 가는 사랑은
사라지고 만족을 하기 위한 사랑만
우후죽순 늘어나는 느낌이다.
사랑과 공감은 함께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때로는 공감으로 인해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공감하기 힘든 것도 존재하기 마련인데
항상 공감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사랑 도우미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일방적인 사랑은 반드시 망한다.
연애를 많이 해야 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연애를 많이 하면 할수록
사랑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사랑을 많이 하는 만큼 비교 심리에
갇힐 위험이 있는데 이걸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
공감을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공감이 진심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기계적인 공감이 아닌 진심이 느껴지는
공감을 하기에 호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사랑도 역시 이와 같은 흐름이 필요하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맞지만
모든 것에 공감을 해야 하는 식으로
사랑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가까워질수록 더 불편하고 더 위험하다.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는 사랑은 금방 식는다.
공감은 불편함으로 인식되고 만남이 부담스러워진다.
한때는 좋게 좋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이제는 피하고 싶은 것들로 여겨진다.
서로가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건 사랑의 본질이 아니다.
진정 서로가 사랑한다면 다름을 인정하고
공감을 형성할 수 있는 인격과 태도가
우선적으로 느껴질 수 있어야 한다.
만족감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랑은
오래가기 힘들다.
사랑에 대해 누구한테 배운 기억이 있었나?
공감과 사랑을 같이 생각해본 적은 있나?
교육적으로 사랑에 대해 배운 기억은 없다.
부모님 세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옛날은 지금보다 훨씬 가부장적인 환경이었기에
공감 없는 사랑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부모님의 사랑과 MZ세대의 사랑은 차이가 있다.
분명 지금이 예전보다 훨씬 편하고
살기도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있어서 만큼은 아직도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단순히 먹고 사는 게 힘들어서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는 게 진정 맞는 걸까?
먹고 사는 게 힘들었다면 지금의
2030 세대가 태어나서는 안 됐다.
먹고 사는 것에만 집중해야 하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게 먹고 살기 힘든 시절임에도
지금에 비해 훨씬 고출산 시대였다.
그때는 컨텐츠가 발전한 시대도 아니었다.
모두가 성장을 위해 달려 나가는 시대였고
그래서인지 연애와 결혼에 대한 이슈가
지금처럼 대두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연애에 대한 온갖 컨텐츠와
이슈들이 넘쳐나고 또 넘쳐난다.
공감은 둘째치고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사랑에 대한 시선이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바뀌었다.
오늘날도 여전히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지만
그나마 행복한 모습들이 많이 보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공감이 함께하는 사랑이 그들 가운데
머물렀으면 하며 나그네는 길을 걸어간다.
차이를 벌리는 게 사랑이 아니라
차이를 좁히는 게 사랑이다.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공감이라면
사랑은 그 공감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잘 맞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름을 인정하며 사랑은 더 성숙해진다.
하지만 나의 다름을 일방적으로 인정하는 식의
사랑을 사랑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자기만족으로 채워진 사랑의 피날레는
가짜 감정으로 구성된 차가운 작품일 뿐이다.
공감을 강요함으로써 가스라이팅을
빌드업 하기 위한 사랑의 행보는
비극적이고 허무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공감을 잘하는 사람은 사랑과 가까워질 수 있다.
하지만 늘상 공감이 이롭게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공감도 여러 감정의 손을 잡고 옷을 바꿔입는다.
마치 공감의 모습인 것마냥 나타나서 마음을
흔들어 놓고 정신을 못차리게 만든다.
공감만 있으면 충분한 사랑.
그런 사랑은 어디에도 없다.
헌신과 희생 없는 사랑의 수명은
짧을 수밖에 없다.
공감으로 사랑을 채우기 보다는
서로를 존중하는 것을 기본으로
여기며 시행착오를 겪는 사랑이
더 오래가지 않을까?
공감만으로 이루어진 사랑은 없다.
다름이 있기에 사랑이 빛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