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상으로 돌아와서야 알게 된 사실
감정기복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대환과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무탈하게 집에 돌아온 날에도 방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지면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대환에게는 솔직할 수 없었다. 엄마에 대한 상실감과,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내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바깥으로 줄줄 새어나올 때에도, 이력서를 쓰는 데 몰두 중인 그에게 난 늘 평화로운 얼굴만 보여줬다.
'이번엔 지원서 이렇게 써봤는데 어때?'
'괜찮은데? 이번에 지원하는 회사랑 잘 맞는 내용인 것 같아.'
'그래? 몇 시간 내내 노트북만 했더니 좀 힘들다.'
'TV보게?'
'응응 TV보면서 맥주 마시게. 넌 뭐하고 있어?'
'그냥 노래듣고 있어, 집에서.'
'넌 지원서 다 썼어?'
'그럼 : ) 다 끝내고 쉬는거야.'
대환은 나와 달리 욕심많은 취업준비생이었고,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기소개서, 회사, 면접, 시험 따위였다. 서운하진 않았다.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였고, 자신의 앞날을 열심히 준비하는 그가 멋있었다. 다만, 확신이 없었다. '아무리 바빠도 내가 아프고 힘들 땐 달려와줄거야.' '여유가 없어서 그렇지 날 보고싶어하고 있을거야.' '그는 언제나 내 편일거야.' 그런 류의 확신.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비집고 나오는 것들을 꼭 끌어안은 채 오리걸음을 하며 그의 뒤를 쫓는 기분으로 그를 만났다. 따지고 보면 내 감정을 숨기기로 한 건 온전히 나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런 선택을 하게 만든 건 결국 대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서운함이 쌓이고 쌓여,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대환을 쌀쌀맞게 대했던 거였다. 덩달아 그도 기분이 상했는지, 안 그래도 차가운 눈빛이 더 얼음장같이 얼어붙어서는 말했다.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해."
그 말이 신호탄이 되어 우리는 몇 시간 동안 말다툼을 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을 방어하기 바쁜 말들을 쏟아냈고, '이성'의 이름으로 서로의 감정을 비아냥거렸다.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콸콸 쏟아지다, 갑자기 그쳐버리는 대화의 끝자락에서, 대환은 말했다.
"그래, 니가 나보다 불행할 수도 있어."
엄마의 죽음을 불행이라 여기지 않으려 아득바득 살았다. 누구나 죽으니까. 엄마의 죽음이 조금 일렀을 뿐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그저 생명이 다 한거라고 밤낮으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내게 일어난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 누구보다 이해와 위로를 바랐던 사람에게, 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못된 말을 내뱉은 건 저쪽인데, 부끄러워지는 건 이쪽이었다.
대환과의 관계가 끝났을 때,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 닫혀 망연자실한 시간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빈틈없이 닫힌 문 앞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기도 했고, 열어주지 않을 걸 알면서 주먹으로 문을 두들겨보기도 했다. 하지만 원래 손잡이따위 없었던 것처럼, 아무도 드나들지 않았던 것처럼, 닫힌 문은 완고했다.
그 때 대환이 차단했던 건 단지 나와의 관계가 아니라 내가 숨 쉴 수 있는 구멍이었다. 당시의 대환은 단순한 연애상대가 아닌 하나의 세계였다. 대환의 가족, 친구, 생활, 미래를 이야기하고, 그의 세상에 들락거리는 일이 나에겐 휴식이었다. 대환은 자신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취업걱정으로 한숨을 쉬어도 내가 타박하지 않아 좋다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당시의 나로서는 타박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하는 남자가 사랑을 속삭이기는 커녕, 정부와 경제난을 비난하느라 바쁘대도, 엄마 없는 세상에 혼자 남겨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으니까. 그 때 필요했던 건 어쩌면 대환이 아니었다. 대환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처럼 행동했지만, 그 사랑의 뿌리는 내가 속한 세계를 회피하고 싶은 열망이었다. 애써 부정하려 했지만 대환의 말이 맞았다. 나는 불행했다. 그걸 인정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랫동안, 대환만을 원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