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호코 커피농장
어두워지는 하늘 위에 먹구름이 낮아지며 후둑후둑 쏟아지던 빗방울이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장대비가 되어 쏟아진다.
커피나무 상태를 설명해주러 숲에 들어갔다가 우산도 모자도 아무 소용없이 다 젖어버렸다.
예코는 아예 신을 신고 다니지 않는다. 붉고 미끄러운 황토는 신발에 시루떡처럼 달라붙고 무거워지니 신발은 의미가 없어진다.
파티오로 비가 몰아치고 대나무 건조대에 빨래가 널려있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냥 맞아야 한다.
그칠 때까지. 그냥 모두 가만있는 거다. 개들도 새도 사람도 오토바이도 모두 비를 바라보며 기다린다.
벨이 울린다. 어둠 속에서 휴대폰을 더듬어 스탠드를 켜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미얀마에서 온 전화다. 눈을 찡그리며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니 밤 12시다.
이 늦은 밤에 온 전화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 텐데, 순간 불안이 엄습한다.
"여보세요"
"사모님, 안녕하세요."
저민이다.
“으응 저민씨, 무슨 일 있어?"
“예코가 오늘 월급 찾으러 갔는데 아직 안 오고 있어요.”
“뭐? 지금 몇 신데?”
“지금 9시 반인데 아까 오토바이가 고장 났다고 전화가 꺼져 있어요.”
순간 농장으로 오가는 길에 가끔 보았던 고장 난 오토바이를 밀고 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칠흑같이 어두워졌을 텐데 공포심이 몰려온다.
“농장 애들이 찾으러 갔는데 오토바이 고치는 데가 문 다 닫았어요. 내일 아침에 다시 가야 돼요.”
월급을 찾았다고 전화한 시간이 2시 30분, 오토바이가 고장 났다고 전화한 시간은 4시 30분, 중간 마을에서 고장 난 것이니 고쳤으면 충분히 오고도 남을 시간인데 농장까지 갈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니 무슨 사달이 나도 났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잠이 확 달아났다. 일어나서 자고 있는 요한을 깨웠다.
“예코코가 은행 갔다 아직 안 온대.”
예민한 요한이 번쩍 눈을 떴다. 강돈가, 무슨 일이 있지 않고서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기랑 집사람이 있는 농장에 돌아오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다시 저민에게 전화를 건다. 경찰에 우선 신고를 해라. 우나잉에게 휴대폰 위치추적을 부탁해봐라.
다시 걸려온 저민의 전화는 지금 밤이 늦어서 경찰들이 수색을 해줄 수 없으며 위치 추적도 어렵다는 답변.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전화를 끊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고자 예코가 움직인 대로 메모를 해봤다.
돈을 찾고 오다가 오토바이가 고장 나서 마을에 들렀는데 돈가방을 보고 누군가가 쫓아와서 예코를 때려눕히고 돈과 오토바이를 홈쳐 달아났을까.
농장으로 가는 길은 민가가 드문데 깊은 숲에 버렸다면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남편과 나는 밤을 꼬박 새웠다.
통장 거래와 카드 거래가 흔치 않은 미얀마에선 땅을 사거나 집을 살 때도 돈다발을 산더미같이 들고 다녀야 한다.
은행에서 현금 다발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늘 범죄의 표적이 될 것 같은 불안감이 현실이 되다니 농장 오토바이가 낡아 늘 마음이 걸렸고 왜소한 체구에 음식을 많이 먹지 않아 병약해 보였던 예코와 농장에 남은 애기와 유케티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침 7시가 되어 미얀마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아침에 다시 찾아봤으나 못 찾았다는 이야기와 밤 사이 예코의 동선과 연락 온 시간을 연결해보니 약간의 의심이 생겨서 마을 사람들과 다시 예코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다행히 예코는 돌아왔다.
아니 예코만 돌아왔다.
농장 직원들의 월급 240만 짯(은행원 한 달 급여가 18만 짯이었으니)과 오토바이와 휴대폰은 돌아오지 않았다.
예코는 태국 로또에 빠져서 지난 4개월 동안 로또에 엄청난 투자를 했고 번번이 수익을 내지 못하자 직원들의 월급을 빼앗기게 된 거였다. 오토바이도, 휴대폰도.
동네 사람들 앞에 불려 가서 살살 구슬리고 협박해서 겨우 예코는 그 모든 사실을 털어놨다.
아직 미얀마의 농촌은 마을 단위로 공동체가 유지되고 마을의 대소사를 서로 의논하고 결정하는 분위기라서 학교나 절이나 모두 마을에서 함께 한다.
예코는 다른 마을 사람이지만 우리 농장을 마을의 농장으로 여겨서 예코를 불러 마을 사람들이 이야기한 것이니 우리 농장과 직원들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인 셈으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예코를 경찰에 넘길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회사에 끼친 손해와 직원들에게 끼칠 나쁜 영향을 생각한다면 당연 경찰에 넘겨야 하겠지만 착하고 어린 유케티와 아기를 생각하니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예코가 한 달에 얼마씩 갚아나가기로 하고 예코를 용서해 주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예코의 단독 범행이 아닐 거라는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농장에서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먹고 자는 직원들이라 서로의 사정을 훤히 잘 알고 있을 것이고 휴일에도 함께 놀러 가기 때문에 예코 혼자 그 일을 했을 거라고 믿기지 않았다.
영화 같은 데서 보면 도박판에서도 바람을 잡는 사람들이 있고 일부러 져주면서 타깃이 된 사람에게 승리의 쾌감을 안겨주며 계속 도박을 할 수밖에 없는 중독의 길로 이끄는 악의 무리가 있지 않은가.
나는 저민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 면담해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라고 했다. 그리고 개별 면담 끝에 농장에 새로 들어온 부부가 예코를 태국 로또에 끌어들인 사실을 알아냈다.
그 두 사람은 이실직고하고 그 길로 집으로 돌려보냈다 다시는 우리 농장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그럴 경우에는 각오를 해야 할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그리고 예코에게 화상으로 말했다.
한 번은 용서해줄 수 있어.
예코. 그 돈은 내 돈이 아니야. 네 동료들의 월급이야.
네 애기의 분유값이야.
동료들에게 만 짯을 한 장 한 장 주고 나머지 돈은 네가 일해서 갚아라, 그리고 미안하다고 동료들에게 말해라.
그리고 예코는 지금까지 그 돈을 잘 갚아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