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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셔레이드 걸 Jun 28. 2020

유난히 길었던 토요일

주말 한정 무한루프를 꿈꾸며

직장에서는 지난주부터 단축근무가 시행되었다.

고작 한 시간 가량 기상시간이 늦춰진 것뿐인데도 아침의 피로도가 달랐다.

조금 늦게 자도 마음이 편했고 출근길 버스에서는 창문에 머리를 쿵쿵 찧어대며 잠을 청하지 않아도 되었다.

원래도 일이 많아서 하루가 눈 깜짝할 새에 사라져버리곤 했는데 이제는 거의 오전 반차를 내고 출근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덕분에 야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행사 일정이 많아 유독 고단했주간이었기에 금요일에는 집에 오자마자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토요일 이른 아침, 엄마에게 걸려온 다급한 한통의 전화.

올해로 만 9살이 된 우리 집의 진짜 막내 봄이가 뭐에 다쳤는지 아침부터 눈을 못 뜬다고 병원에 좀 데려가 달라고 하셨다.

대충 씻고는 옆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던 보리를 깨워 산책을 시킨 뒤 봄이가 있는 배밭으로 향했다.

원래도 한쪽 눈에 만성 체리아이가 심하던 녀석이었는데 얼핏 보기에도 아예 양쪽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눈밑이 퉁퉁 부어 있었다.

부랴부랴 단골병원으로 가 다행히 늘 진료받던 부원장님에게 보여드리고 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소견을 듣고 3일 치 안약과 가루약을 처방받아 돌아왔다.

덕분에 오랜만에 배밭에 들렀다.

배를 솎고 봉지를 싸느라 분주한 부모님의 곁에 보리보다 두 살 어리고 봄이보다는 두 살이 많은 커피가 울적한 얼굴을 하고 있어 산책을 시켜주고 실컷 쓰다듬어 주었다.

까칠하고 예민하며 여전히 식구들에게도 곁을 잘 주지 않는 보리와 달리 두 녀석은 사람의 손을 무척 좋아하는 애교쟁이들이다.

불편한 몸으로 외출을 한 것이 고단했던지 5킬로 밖에 안 되는 조그만 봄이는 넥카라를 한 채 간식 두어 개를 받아먹은 뒤 쿨쿨 잠들어버렸다.

나도 모처럼 엄마가 차려준 밥상을 받아 상추쌈에 불고기로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워냈다.

그런 뒤 집으로 돌아왔는데 평소 같으면 여전히 이불속에 있을 시간(주말한정)이었다.

씻고 에어컨 바람을 쐬며 단지 내에 새로 오픈한 무인 아이스크림 할인점에서 잔뜩 사 온 아이스바 하나를 물고 있노라니 잠이 솔솔 쏟아졌다.

기분 좋게 낮잠을 두어 시간 잔 뒤 일어나 잔뜩 뜯어온 상추, 깻잎, 쑥갓 등을 소비한다는 명목으로 마트에서 온라인 배달시킨 목살 양념구이를 굽기 위해 프라이팬을 꺼냈다.

밥을 해 먹고 치웠는데도 몸이 개운했다. 평소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력이 없어 늘 배달음식으로 연명했다.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늘 부족하고 쫓기듯 억울하게 주말이 지나갔는데 뭘 해도 아직 날이 밝았다.

친구와 요즘 구상 중인 사업 아이템에 관해 오랜 카톡을 나눴다.

사업이라고 명명하니 거창하지만 실제 사업자를 내고 일 년째 무탈하게 운영 중인 친구와 캐치볼 하듯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것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아직 상담받기조차 곤란할만치 엉성한 내용이지만... 잘 되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다.   


길게 보낸 토요일 탓인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덕분에 일요일도 평소보다 눈이 금세 떠졌고 동생이 그렇게 먹고 싶어 하던 시판 냉면으로 점심을 차려먹었다.

동생과 강아지는 낮잠을 자는 중이고 나는 용량 부족의 넷북에 윈도우10 업데이트를 깔아보겠다고 끙끙대는 동시에 브런치에 글을 쓰고  블루투스 스피커로는 스벅 5월 2주 차 매장 BGM을 듣고 있다.

얼핏 완벽한 듯싶지만 이 시간이면 늘 그렇듯 냉장고에 쟁여놓은 커피우유가 동이 나고 만다.
일요일 개콘이 사라진 이후 주말의 종료를 알리는 나만의 시그널이다.

그래도 괜찮다.

아직 밖은 밝고 나는 내일도 한 시간 늦게 일어나 게으른 출근을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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