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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난다 May 15. 2017

Feeling coffee

커피, 이야기가 되다.

“사장님! 로스팅 바뀌었어요?”

“왜요?”

“지난주에 신맛이 좀 덜하던데.”


파푸아뉴기니 마라와카 블루마운틴 원두만 구입해 가는 젊은 남자 손님이다. 미식가일 뿐만 아니라 ‘덕후’ 기질도 있어 카페에서 가끔 커피의 향미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한다.

나는 마라와카 블루마운틴을 1차 크랙과 2차 크랙의 사이인 휴지기 215℃에 배출한다. 카페에서 판매 중인 예가체프 보다는 조금 더 볶고 케냐 보다는 조금 덜 볶는다. 이 정도로 로스팅을 하면 청사과의 좋은 신맛과 견과류의 고소함, 달달한 후미가 오래 남는(Long after taste) 굿 밸런스의 커피를 맛볼 수 있다. 그리고 원두 봉투를 열고 코를 갖다 대면 향나무의 좋은 향이 나는데 커핑에서는 이를 ‘시더(cedar)’라는 노트(note)로 표현한다.  

마라와카 블루마운틴은 로스터리 카페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판매했던 커피로 지금껏 단 한 번도 로스팅 포인트를 바꾼 적이 없었다. 몇 번의 테스트를 거쳐 결정한 그대로 로스팅을 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커피의 신맛이 약해졌다는 손님의 말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로스터리 카페를 운영하다 보면 늘 일정한 시간과 온도(Roasting profile)로 로스팅을 하는데도 맛이 달라졌다고 하는 손님이 가끔 있다. 생두(Green bean), 감별, 로스팅 시간과 온도 등 고객에게 원두가 전달될 때까지 향미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변수들은 대체로 일정하게 통제가 된다. 그러므로 현저하게 맛이 달라진 원두가 고객에게 판매될 확률은 매우 낮다. 오히려 고객이 구입한 원두를 어떻게 보관, 분쇄, 추출하느냐에 따라 그 맛이 다르게 느껴질 여지가 있다. 하지만 원두를 구입한 이후의 이런 변수들은 생두의 상태와 로스팅 과정에 비하면 영향이 아주 미미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같은 커피의 향미를 현저하게 다르게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밀도 높은 기계만큼 감각이 발달된 사람의 경우에는 미세한 맛의 차이를 감지할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마시는 사람의 컨디션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짬뽕 한 그릇을 비우고 탕수육까지 나눠 먹은 사람에게 추가로 나온 짜장면은 어떤 맛일까? 생각만 해도 부담이 되는 일이나 싫은 사람과 함께 하는 커피 맛이 좋을 리가 없다.


지금이야 손님들이 커피 맛에 대해 어떤 말을 하더라도 대처하는 나름대로의 방식이 생겼지만 처음에는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고민스러웠다. 심지어 나 자신도 내 손으로 직접 로스팅을 한 커피가 왜 맛이 다르게 느껴지는지 의문이 들었던 적이 많았다. 돌이켜 보면 그 시간이 제법 오래갔었던 것 같다.


누구와 함께, 어떤 장소에서 그리고 마시는 사람의 감정 상태에 따라 커피의 맛은 크게 좌우된다. 재료(생두), 로스팅, 추출 등 커피의 향미에 영향을 주는 객관적이고 명확한 변수들이 단번에 왜곡이 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커피는 기호식품이기 때문이다.


로스터리나 핸드드립 전문 카페를 다니다 보면 벽에 걸려 있는 수많은 커피 자격증이 눈에 띈다. 베이커리나 다른 일반 음식점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인데 이는 커피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커피 향미에 대해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커피를 소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커피에 관한 이론과 경험은 물론 향미를 표현하는 기초적인 용어조차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극히 주관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고 이런 점 때문에 커피 향미를 두고 주인과 손님 간에 가끔 난감한 상황이 펼쳐지기도 하는 것이다.


카페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커피를 평가의 대상이 아닌 존중의 대상으로 보게 된다. 생긴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자세로 커피에 대해 말하게 된다. 감각이 무뎌진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하는 손님도 있지만 이해의 폭이 넓어진 것이라며 웃어넘긴다. 마냥 좋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가 어떤 실수를 하든지 용서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피곤한 오후보다는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른 아침,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커피를 만나보라. 그런 시간이 반복되면 언젠가 커피라는 말만 들어도 침샘이 고이고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커피의 노예가 되는 삶을 기꺼이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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