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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내 딸들에게

by 연후 할아버지

머리말. 내 딸들에게



며칠 전, 대학 동기회 모임에 나갔더니 내 친구들이 그러더라. 한 명이 ‘아직도 며느리를 딸이라 부르는 멍청이가 있냐?’로 시작하니. 다른 친구들이 맞장구를 친다.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을 부정하며, 자기 혼자만 특별하다는 착각에 빠져 사는 게지."

"새벽에 울어야 할 수탉이 한밤중에도 울어대는 시대니 어찌 정신 나간 놈이 없겠나?"

"멀리서 찾을 것 있나? 여기도 그런 늙은이가 보이더라."


나에게 하는 말인 줄 뻔히 알지만, 그들의 눈에는 내가 이미 팔불출인데, 변명한다고 달라질 게 있겠나? 모른 척하고 그냥 넘어가려다가, 제동이라도 걸어 놓지 않으면 더 심해질 것 같아서 짜증 섞인 목소리로 신경질을 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니 1절에서 끝냅시다. 2절까지 가다가는 서로 시중 잡배로 변할까 두렵네."


평소에 이런 말들이 오갔으면 웃고 넘겼겠지만, 집중공격을 받아선지 그날은 나도 심기가 상당히 불편했던 것 같다. 그러나 곧, 이런 대화나 비난도 가까운 친구 사이라서 나눌 수 있는 거라고 스스로 마음을 다스렸다. (대학 동기들이라 <가까운 친구>로 표현했지만, 4년 동안 밤낮으로 함께 지낸 우리는 <죽마고우> 비슷한 관계다.)




결혼 후, 나는 처음부터 딸을 갖길 원했는데, 친구들의 말대로 재주가 부족해서였는지 아내가 계속 아들만 낳아서 그 소망을 접은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딸이 없어서 크게 불편하거나 아쉬웠던 적은 별로 없었다.


아들들이 크는 걸 보는 재미도 작지 않아서 한동안 딸을 원했다는 사실마저 잊고 살았는데, 그들이 장성해 결혼을 하니 그 짝들이 나를 아버지라 부른다. 내게도 이젠 딸들이 생겨 으쓱해졌다.


그렇게 얻은 자네들을 <내 아들의 아내>라 부를 수는 없었고, 며느리라 하려니 거리감이 너무 느껴져, 발음하기 쉬운 ‘딸’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버릇이 되어 버렸구나. 느닷없이 집중포화를 쏘아 댄 걸 보면, 나의 이런 행위가 아들을 얻지 못해 딸만 가진 친구들의 심술보를 건드렸나 보다.


가까운 사이들이지만 젊었을 때는 서로 바빠서 남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간섭하지는 않았는데, 나이가 들면 입으로만 양기가 올라간다더니, 그날의 설전도 노화 현상 중의 하나로 보면 되겠다.




유행가 가사처럼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되는 세태라지만, 하느님 앞에서 평생을 동행하기로 맹세했고 자녀들까지 줄줄이 생산한 내 딸들과는 무관한 얘기라 확신한다.


시집을 오는지 장가(장인의 집)를 가는지도 불분명한 시대에 출가외인(出嫁外人)이나 여필종부(女必從夫)와 같은 오래전에 고어가 된 사자성어들을 소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내 아들들의 짝이며 손주들의 어머니로서 가족의 뿌리를 살펴본다고 크게 손해 날 일은 아니니, 잠시 짬을 내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들을 읽어 달라는 부탁을 해 보려는 것이다.


아들들을 키울 때는 얘기할 시간적인 여유가 항상 부족했는데, 이제 나에게는 남아도는 게 그것이라, 부자간의 관계도 개선할 겸 대화를 좀 나눠 보려 했더니 이번에는 그들이 모두 바쁘다고 피한다.

(나에겐 남는 게 시간이더라도 자네들은 그렇지 않고, 나를 닮아 집안일을 잘 모르는 자네들의 남편들보다 항상 더 바쁜데, ‘예’라는 대답을 너무 믿지 말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 서방들처럼 대놓고 거절하지는 마라. 그 나이 때는 나도 그랬으니 생소한 풍경은 아니었지만, 토사구팽이나 고려장을 당한 기분이라 서운한 감정은 오래 지속되었고, 한 번 발동한 노인의 집념은 포기가 되지 않아 자네들에게까지 밀려가게 된 것이다.


그들이 바쁘다면 그들의 자녀들(나의 손주들}에게라도 이 얘기들을 전하겠다는 또 다른 목표가 생겼는데, 말보다는 글로 써 놓는 게 효과적이라는 엉뚱한 결론에 도달해 과욕을 부리게 되었다.


아직 어린아이들인데 늙은이의 곰팡내 나는 옛날이야기에 관심이라도 갖겠나?, 그래서 중간 단계를 하나 더 거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일단 자네들이 읽고 기억 속에 저장했다가 기회가 생길 때 조금씩 꺼내 전하게 하면 되겠다 싶었던 것이다.




영어로는 며느리를 ‘법적인 딸(Daughter in law)’이라 표현하던데, ‘법적’이란 말만 빼면 결국 ‘딸’이란 뜻이 아니냐? 억지 주장이란 걸 잘 알지만, 논리의 타당성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여겨 주기 바란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미국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일 때, 인도 출신 그녀의 어머니가 ‘너는 코코넛 나무에서 갑자기 떨어진 열매가 아니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는 사실을 패러디한 ‘코코넛 밈‘이 폭발적 반응을 보이자, 생과일로 만든 주스들이 불티나게 팔렸다던데, 그분 말씀대로 원인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우선, 씨앗의 싹이 터야 줄기와 잎이 생기고 때로는 거대한 나무로 자라지만, 어떤 경우라도 뿌리가 부실하면 사상누각이 된다. 그렇다고 <뿌리 깊은 나무> 운운하면서 <용비어천가>를 읊을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


소박한 마음으로 쓰다가 어느 정도의 분량으로 모아지면, 내 젊은 날(1970년대 중반), 불쑥 나타나 온 세상에 충격을 줬던 <뿌리>나 ‘<쿤타킨테>의 조상 이야기’ <만딩고>라는 영화와 유사한 내용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 사항이다.


하지만, 미래에 일어날 결과를 누가 감히 속단할 수 있으랴? 인시알라! (‘잘 모르겠다’는 대답의 우회적 표현인데, ‘알라만 안다’는 뜻이라 한다. 지구상의 모든 무슬림들이 입에 걸고 사는 말이다.) 모두가 바빠 죽겠다는 시대에, 자신과는 상관없는 얘기를 누가 들어주겠느냐? 그래서 우선은, 손주들을 빙자하면 읽어 줄 확률이 높은 내 딸들을 일차적인 독자로 정했다.


쓰기도 전에 읽어 줄 걱정을 하는 건 <오졸정센>의 아들다운 김칫국 마시기요 미리 하는 행복한 고민이다. 먼저, 써놓아야 독자가 생기거나 말거나 할 게 아니냐?


시작할 때의 의욕과 끝까지 완료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인데, 나의 인내와 끈기는 언제나 계획보다는 작고 짧아서, 목표라도 높게 걸어놓지 않으면 작심삼일로 끝날 확률이 높은 게 문제다.


헛된 꿈이라도 꾸면서 쓰다 보면 조금이라도 더 오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마음을 다잡아 보는데,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에나 기대어 용기를 내 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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