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부터 써보려는 건, <쪼끄마니>라는 별명을 가졌던 내 부친의 생애가 주된 내용이다. 거기에다 이해를 돕고 설명하기 위해 나의 관찰과 체험을 조미료처럼 약간 첨가할 생각이다.
세상에 영원한 게 없듯이 그분의 별명은 연세가 드시면서, 번개, 불칼, 오졸정센 등으로 차츰 변해 갔지만, 당신께서 가장 좋아하고 자랑으로 여겼던 건 역시 <쪼끄마니>라 그것을 제목으로 정했다.
사실, 그분의 체구는 보통사람들에 비하면 왜소하기는커녕 기골이 당당했지만, 씨름선수로는 작은 편에 속했던지 젊었을 때 씨름판에서는 모두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요즘에도, 운동선수 중에서 크거나 작거나 특별한 체구를 지닌 사람이 세인들의 주목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작은 덩치로 가끔 장사 칭호를 얻고 황소를 따기도 했다니 당시에 그의 인기는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때가 당신의 일생에서 가장 빛난 황금기로 기억되셨던지, ‘<쪼끄마니>가 떠야 씨름판이 흥청거렸다’고 자랑스럽게 말하실 때면 언제나 꿈꾸는 소년의 눈빛으로 변하곤 하셨다.
나의 육친이라 그분의 얘기를 쓴다면,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 거짓과 과장법을 동원해 미화시킬 작정이 아닐까 의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기우요 오해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분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가까이에 있어도 다가서지 못했던 그래 내가 미워했었다’ 던 인순이 노래 가사처럼, 우리 부자 사이는 서로 다정했던 적이 거의 없었고, 오히려 내가 반항하고 원망했던 기간이 대부분이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던 분의 일생을 써보겠다는 만용이 과연 옳은 결정이었는지 회의부터 생긴다. 객관적인 묘사를 위해서는 자랑스럽지 못한 나의 과거와 치부도 함께 노출시켜야 하는 수치심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내가 그분의 일생에 관한 글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오래전부터였지만, 갖가지 이유를 붙이며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었던 원인도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어느덧 그분께서 세상을 떠나신 나이에 가까워졌다는 자각이 생기자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직 기억력이 남아 있는 이 시기마저 놓쳐버리면 영원히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과 머뭇거리기만 하다가 적기를 놓쳐버린 적이 많았던 내 인생에 대한 회한이 겹쳐서, 서둘려 결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압박했다.
대중의 칭송을 받을 대단한 업적을 남기거나, 새로운 왕조를 창건하여 스스로 왕으로 군림했던 분도 아니니, 뻥튀기한 전기나 가공된 역사를 창조할 대상은 아니고 그럴 생각도 없다.
개성이 뚜렷했던 분의 이야기라 재미는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버린 건 아니지만 그건 친족들에게나 해당될 사항이지, 할 일 많고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관심을 끌 만한 요소는 아닐 수도 있는데, 어느 쪽이 정답이든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앞쪽이 아니고 뒤쪽이 맞다면, 이 글을 읽어 주길 바라는 대상을 대중이 아니라 내 자손들로 한정하고, 그들에게 약간의 지혜와 도움을 주는 쪽으로 방향과 목표를 수정하면 된다. 그렇게만 되더라도 시간을 투자한 노력의 대가는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 본다.
이런 소박한 각오와 평정심을 계속 유지할 수만 있다면, 긴장하거나 마음을 졸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운동선수들이 입버릇처럼 되뇌는 말이라는데, 그것도 어렵다면 운명으로 여기고 감수하면 그만이다.
그 나이가 되도록 어찌 너의 부끄러움 따위를 따지느냐? 또한 지금 네가 저질러 보려고 하는 작업은, 어차피 너의 과거에 대한 회개와 반성의 일환이고, 인연이 닿은 독자가 반면교사로 삼아 같은 실수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 아니더냐? 이렇게 자기 최면을 걸어가며 쉬지 않고 달려가 보려 한다.
요즘에는, 무심코 거울을 보다가 나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그렇게 미워했던 부친이 뻔히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나타나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잦아졌다.
오래전부터 나를 그의 판박이라는 말들을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었지만, 나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나 스스로에게도 ‘절대로 아니다’고 단번에 부인하곤 했었다.
제목으로 사용한 <쪼끄마니>라는 별명도 사실은, 그분의 일방적인 주장이었을 뿐, 나와 함께 살던 기간에는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고 등 뒤에서 <오졸정센>이라 속삭이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오졸오졸 걷는 것 같지만 속도는 엄청 빠르다는 특성과 <선생>이라는 일본어를 합쳐 만든 조어 같은데, 이 별명이 오히려 내 기억 속의 그분뿐만이 아니라 지금의 내 모습과도 잘 어울린다. 그와 내가 닮았다고 주장했던 사람들도 이런 유사한 면을 봤던 것 같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반응하는 내 행동을 보면 금방 짐작이 갈 것이다. 미리부터 긴장해 조바심을 내며 안달을 하다가, 막상 일이 시작되면 딴생각을 하며 집중력을 잃는 약점이 있는 반면에, 약간 덤벙거리기는 하지만 잽싸고 빠른 실행의 습관도 있으니, 그분 유전자의 장단점을 골고루 물려받은 셈이다.
이처럼, 외모와 성격 어느 쪽을 보더라도 그가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임은 틀림없는데, 그와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뜻이 맞지 않고 융화되지 못했을까? 동일한 자극을 가진 자석이라 반탄력이 거셀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할 수는 있겠다.
미워한 건 어쩌면 그분에 대한 나의 일방적인 감정이었고, 그분께서는 막내아들을 끔찍이 사랑하셨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요즘에야 가끔 하기도 한다.
때로는 그분이 그리워 눈물을 흘릴 때도 있지만, 노년기가 되어 감상적으로 변한 감정선이나 눈물샘에 이상이 생긴 거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경상도식 반어법을 동반한 무뚝뚝한 말투는 특별히 나에게만 쏘아대던 미사일이 아니고 가족 모두가 수시로 맞고 감내해야 하던 재래식 폭탄이었는데, 나 혼자 상처를 입어 반항하고 원망했던 건, 다른 사람들은 긴 세월 동안 적응이 되어 있었는데 비해, 나는 예정에 없던 일을 갑자기 당해서 당황하고 놀랐던 것일 수도 있다.
마찰이 잦아지니 어쩔 줄을 몰라 눈치 보고 피해만 다니다가 결국은 멀리 도망치고 말았다. 융화를 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데는 세월이 필요했는데, 우리 부자에게는 그 기간이 너무 짧고 부족했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우리는 운명적으로 영원히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 관계였다. 많은 원인들을 나열할 수 있지만, 오래전에 끝난 일을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으니,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따라왔으면 그냥 그대로 덮어두고 함께 흘러가는 게 최선의 방법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