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소개란을 보다가
브런치에는 작가소개라는 곳이 있다. 진득하게 고민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나를 소개하는 공간을 비워둘 수는 없다. 나를 몇 글자로 규정해 버릴 것 같아서 마냥 채워 넣을 수도 없다. 자기소개는 대학입시와 취업전선에서 가치 있는 사람임을 포장해서 보여주는 행위였다. 그러다 보니 자기소개란을 채우는 행위는 공포 그 자체였다. 마트에선 가격인하, 1+1, 추가적인 할인과 적립등의 이벤트를 하며 상품을 판다. 자기소개를 채워가는 우리는 상품이 된다. 상품의 심정으로 글을 쓰니 딱딱하고 우울할 수밖에.
이 소개란을 채울 당시엔 세상을 놀이터로 생각했나 보다. 지금도 큰 변화는 없지만 마냥 안전한 놀이터는 아니란 걸 깨닫고 있다. 좋아하는 노래를 반복해서 듣는 성향과 살고 있는 지역도 기록해 놓았다. 예전에는 남편과 아빠라는 타이틀이 첫 줄에 있었다. 아빠와 남편은 관계 속에서 정의되는 표현이다. 나라는 존재를 관계가 아닌 곳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우리는 관계 속에서 명명되고 직업이라는 문화 속에서 가치관이 만들어진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직장에서 통용되는 것이다. 내가 병원을 그만두거나 직장을 바꾸면 다르게 명명된다. 관계가 변하는 것이다. 국가나 고향, 인종과 같이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것들도 있지만, 아빠와 남편과 같이 관계를 선택하고 만들 수도 있다. 나는 내시경실 간호사에서 퇴근과 동시에 아빠 업무와 남편 업무를 수행한다. 일 보다 더 힘들 때도 있지만 거짓 웃음이나 접대용 멘트를 쓸 일이 없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되돌려 받는다. 내가 일을 하면서 다른 대상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거나 아빠최고라는 표현을 들을 일은 없으니까. 무대 위의 락스타를 바라보는 팬처럼 아들들은 내가 놀아주길 기대한다.
아빠가 되면 존재의 의미가 한 번에 해소된다. 아빠라는 단어는 주말에 해야 할 일들을 정해 주고 퇴근후 해야 할 일들도 명확히 알려준다. 함께 저녁을 먹고 나서 설거지를 하고 기차놀이와 블록놀이를 한 뒤 소파에 아이들을 던지고 놀아준다. 아니다. 같이 논다. 아이들과 놀 때는 내가 더 행복하고 즐겁다. 우울감을 느낄 새가 없다. 존재의 의미와 미래에 대한 불안은 어쩔 수 없지만, 아빠가 되면 그러한 고민조차 필요가 없다. 아빠가 되어 느끼는 책임감은 인간이라는 근원적 질문조차 잊게 만든다.
나는 아빠이자 남편으로 살아간다. 내가 직접 만들어낸 이 관계 속에서 울고 웃으며 어른이 되는 것이다. 물론, 어른이 되는 건 쉽지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