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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Oct 27. 2018

먼 곳에서 전하는 안부

말을 하지 않는 사람

같은 마음에서 시작되어 우리의 입술을 빠져나온 말들은 계절을 따라서, 공기를 따라서 조금씩 다른 옷을 입었다. 당신이 속삭인 말들이 너무나 따듯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겨울을 날 수도 있었고, 때론 당신의 목소리조차 기억나지 않아 추운 여름을 앓기도 했다. 

분명 당신이 뱉었던 말은 하나였는데. 선명하고 확실해서 손에 잡힐 것도 같았는데.

사랑한단 말이 외롭단 말로, 외롭단 말은 슬프단 말로, 그래서 결국엔 모두 아프단 말로 변해버렸다. 난 그 말들에 둘러싸여 계절의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어디도 아닌 곳의 변두리에 걸쳐 있었다.


아마도 그 시절 난 어딘가에서 어쩌면 당신은 이런 사람이겠지, 라는 생각을 속으로 쌓아가며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뱉어내지 못했었던 것 같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계절을 비켜간 한 겨울의 비처럼 지나가고 스쳐가길 바랐었다. 이룰 수 없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라 차라리 절망에 가깝다는 것을, 목적을 알 수 없는 방향은 불안이라는 걸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그것들이 날 둘러쌓고 세차게 떨어지고 있었으므로 난 마음속 어떤 이야기도 끄집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분명 무언가 말을 해야 함이 당연한데도 도무지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 그래 백 번 양보해서 말을 하진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만은 건네야 할 텐데. 건너온 마음도 슬며시 받아낼 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 어느 것도 하지 못하고는 입도 마음도 닫아버린 사람. 

섞여있기보다는 혼자 있었고, 말을 하지 않고 듣기만 했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사람과 지내는 내내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나뿐 아니라 숙소의 모든 여행자가 그랬을 것이다.

분명 무언가 사연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라고 짐작하는 수밖에. 아마도 얼마 전 연인과 헤어진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지금은 묵언수행 중일지도 모른다. 뭐 대충 그 정도의 이유들을 나열해보고는, ‘아... 저 사람은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지금은 도무지 한 마디도 하기가 싫은 거야.’라고 생각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만의 영역을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침묵이 침묵이 아니라 선명한 선언이자 의지처럼 보였다. 그 언젠가의 나처럼.



하루는 그 언젠가의 날처럼 세차게 비가 내렸다. 우산조차 의미 없을 것 같았기에 숙소에 갇힌 채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옆 테이블의 그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건넸다. 아니  그는 혼잣말을 했는데 내가 소스라치게 반응했는지도 모르겠다.

“뭐라고요?”

난 깜짝 놀란 듯이 그에게 되물었고 그는 날 바라보지도 않은 채 말인지 한 숨인지를 조용히 읊조렸다.

“떠나는 사람의 등을 보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 그 사람을 떠나보내고 나니 알 것 같아요. 몇 번이고 내 등만 바라봤던 그 사람은 정말이지 참 많이 힘들었겠구나.”

그 사람은 다시금 커피를 마시면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지만 고작 한마디에 나는 그의 모든 것이 이해되어버린 상황. 



이해와 인정의 영역을 구분하기 전에 그 모든 것이 이유를 묻지 않은 채 나에게 다가올 때가 있다. 나는 감히 그것을 공감이라 하겠다. 이해나 인정과는 달리 공감은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감은 진하고 견고하다. 때론 눈물을 동반하기도 하겠지만 슬프지 않고, 내 것을 내어줄 때도 있지만 아깝지 않다. 세상이 이런 것들로만 채워질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 앞에서 눈을 질끈 감아야 할 일도, 보기 싫어 뒤돌아 서야 할 일도 없을 텐데. 이 남자도 나도 조금은 더 잘 살아볼 수 있을 텐데.



“상처 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는 어쩌면 또 다른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요.”

“때론 상처라는 게 마음을 주고받는 일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마음을 주고받는 건데 그게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할까요? 왜 말 한마디 건넬 수 없을까요.”

“마음이라서 그래요. 마음은 진심이니까. 진심은 원래 전달되기가 쉽지 않거든요. 우리는 저마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상처 난 마음은 좀처럼 열리지 않으니까.”

“그래도 다시 해야지요. 마음을 주고받는 것도, 사랑을 하는 것도.”

“맞아요.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언젠가는요.”

침묵 속에서도 대화는 마음을 타고 이어졌다.



우리가 삶을 살아내는 동안, 마음을 주고받는 동안 누군가를 떠나고 또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것. 상처 받고 상처 주는 건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인데도 결국 그것 때문에 마음이 닫히고 입을 닫아버린 사람. 그것이 생의 전부였고 그것에 실패했으므로 더 이상 무엇도 할 힘이 남아 있질 않은 사람.

언젠간 그 사람이 다시 입을 열어 누군가에게 사랑을 전하길 기대하며, 그의 침묵에 마음으로 위로를 건네 본다.  

말을 하지 않는 그 남자의 옆, 커피 향이 진해진다. 진해진 향만큼 어떤 기억은 점점 선명해졌고 지금 이곳의 현실은 점점 희미해진다. 나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선명해진 그 기억에 조금의 가정을 붙이기 시작했다. 

당신과의 그 언젠가를 기억의 앞으로 끄러다 놓고는 함께 이 빗속에 갇힌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당신이 없어 할 수 없었던 그 많은 말들을 수다스럽게 말할 수 있을까? 그 이야기들은 커피가 식고 향이 흐려질 때까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신과는 상관없다고 당신을 몰아쳤었던 각진 내 말들도 없었던 것이 될 지도. 하지만 이 비가 그치고 나면 결국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나는 다시 눈을 뜬다.



당신을 떠올리는 기억이 더 이상 아프지 않은 지금, 이제는 너무 먼 곳, 말을 해도 닿지 않을 당신에게 가볍게 안녕을 건네도 괜찮을 것이다. 

전해진 안부가 마음을 이어 공기를 채우고 그것들이 보듬어준 마음이 이제는 아프지 않다고 전해주길.

우리의 말들이 계절을 따라, 공기를 따라 조금은 변해버렸다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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