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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Oct 29. 2022

Filial Piety

“한 수 박사님 안녕하세요. 채널 영의 메디컬 프로그램 론칭쇼에 참석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지난 인터뷰 때 암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나눠 보았는데요. 많은 시청자분께서 암 치료와 최근 진행 중인 항암제 연구들에 대해 알 수 있었다는 후기를 남겨 주셨어요. 또, 쉽지 않은 이야기였을 텐데 아버님의 암 투병기를 공유해주셔서 많은 위로가 되었다는 후기도 있었습니다. 최근 박사님과 아버님의 근황에 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네, 잘 지내셨죠? 저는 하루하루가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어요. 특별한 이벤트는 없었네요. 아버님과는 촬영 전에 잠깐 통화를 했는데요, 아무래도 연세가 많으시기도 하고 최근에 컨디션이 좀 안 좋아지셨어요. 주변 분들도 응원을 많이 해주시고 또 제가 아버님과 통화할 때 응원의 글들 읽어드리기도 했거든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다고, 덕분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고 하셨어요. 여러분들도 환절기 건강 유의하시고 항상 행복하셨으면 좋겠다고 꼭 좀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저희야말로 두 분의 이야기에 많은 위로를 받고 있어요. 다음에 또 아버님 소식 전해주시면 좋겠어요. 자, 오늘은……”


수는 촬영 후에 가지고 온 간식을 촬영팀에 전달했다. 장소가 익숙한 듯 출구 쪽으로 곧장 향하는 수를 보고 직원들이 인사를 건넸다. ‘박사님, 이거 버섯인데 아버님이랑 같이 드세요. 화이팅 하시라고 전해주세요!’ 수는 웃으며 녹음기사 대영이 건네는 박스를 받아들였다. ‘아이고 이런 걸다. 이거 귀한 버섯인데 절 주시면 어떡하나요.’ 대영은 모자 아래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거슬리는지 긁적거리다 생각났다는 듯 가방을 뒤져 편지를 건넸다. ‘이거 저희 어머니께서 박사님께 손 편지 쓰신 건데 꼭 좀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저희 어머니 치료 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 박사님 덕분입니다.’ 수는 대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머니께서 잘 버텨준 덕분이죠.’ 수는 편지를 받아 소중하게 바라보다 코트 안쪽 주머니에 조심히 넣었다. ‘어머니께 감사하다고 꼭 전해주세요.’ 대영은 묵례를 건네고 촬영팀이 모여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수는 주차장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디가 불편한지 얼굴을 찡그리다 걸음을 멈췄다. 안쪽 주머니에 넣어둔 편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거슬려 수는 편지를 다시 꺼내더니 한 손으로 구겨 쓰레기통 쪽으로 던졌다. ‘쓸데없는 인사치레.’ 수는 자신의 차가 주차된 곳 쪽으로 가더니 곧 트렁크를 열고 버섯 박스를 던지듯 넣었다. 코트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지자 수는 트렁크 문을 닫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화면에 뜬 ‘마음에 손 센터 보호사’ 문구를 보자마자 일형은 휴대폰을 조수석에 던졌다. 곧 전화는 끊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가 전달됐다. [두통약 좀 드릴게요. 그리고 병원 진료도 필요해 보이는 데 전화 좀 주세요.] 수는 휴대폰을 바로 집어 들어 보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제가 전에도 말했죠. 아버지한테 약 주지 말라고. 아니 약 함부로 쓰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아버지 약은 제가 보내드리는 것 외에는 쓰지 마세요. 그리고 병원 진료라니요? 제가 언제 그런 부탁 한 적 있습니까? 아버지 거기 맡길 때 제가 허락하는 것 외에는 다 안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박사님, 아버님이 머리가 몹시 아프시대요. 어제부터 미열도 있으시고요. 아무래도 우리 센터에 연계된 병원에 가서 진료라도 받아야 할 것 같아요. 밤엔 헛소리도 하세요. 아니면 직접 오셔서 좀 봐주세요.”

“아아, 됐습니다. 아버지가 저한테 말씀하신 게 있어요. 더 이상 병원엔 가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제가 직접 전화하기 전까지는 연락하지 마세요. 아셨죠? 자꾸 계약사항을 위반하시면 아버지 다른 곳으로 옮기는 수밖에 없어요.”


계약사항. 여현은 ‘입소 대장/계약서’라는 테이프가 붙여진 서랍장을 열었다. ‘한… 한… 일형… 여기 있다.’ 여현은 투명 파일을 꺼냈다. 반년 전 입소 때 찍은 일형의 사진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여현은 그때의 모습과는 다른 얼굴이 되어버린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파일 안에는 일형이 입소 때 그린 그림도 있었다. 일형은 평생을 제 이름으로 살지 못한 듯했다. ‘한 씨’로 불리던 일형은 남의 집 잡일을 도와 돈을 벌기도 했고, 공사 현장에 나가 시멘트와 벽돌 나르는 일을 하기도 했다. 일형이 마지막에 한 일은 수를 일류대에 보내는 일이었는데 일형은 아들이 대학 문을 넘을 때와 미국에 있는 병원으로 갈 때 입국장에 들어서는 아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일형이 절대 가질 수 없었던 뒷모습을 수가 하고 있었다는 말에 여현은 그게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았지만 이내 도리질을 쳤다. 일형은 아들을 따라 센터에 오던 날 이 그림을 그렸다. 삐뚤빼뚤 그어진 선들이 모여 네모난 집이 되었다. 파랗게 칠해진 하늘과 노랗게 칠해진 센터. 일형은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를 하고 커다란 손으로 아들의 손을 붙잡고 있다가 아들의 흰 머리카락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리고 이내 까만색 크레파스로 아들의 머리를 칠했다. ‘우리 아들, 잘 생겼지요.’ 일형은 떠나는 아들을 보며 손을 흔들다가 익숙한 듯 방으로 들어가 방에 누웠다. 한참 등을 돌리고 있던 일형이 일어나 앉더니 벽에 등을 기댔다. 무릎을 끌어안고 그림을 내려다보던 일형이 중얼거렸다. ‘수야, 너는 왜 내 아들로 온걸까. 아버지는 고작 저 크레파스 쥘 힘밖에 없는데.’ 여현이 주스가 담긴 쟁반을 들고 들어가자 일형은 쭈글쭈글한 손등에 두껍게 남은 상처를 손톱으로 건드리며 웃었다. 뜨끈한 방이 마음에 드는지 이리저리 손바닥을 대보더니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여현에게 내밀었다. ‘우리 아들한테 차 조심하라고 넣어주세요.’ 여현은 일형의 휴대폰으로 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여현이 생각해보니 답장을 기다린 건 일형이 아니라 여현 자신이었다. 일형의 문자 메시지 함에는 수에게서 온 답장은 하나도 없었다. 일형의 휴대폰은 항상 서랍 속에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 아들 수는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일형은 알고 있었다. 계약 사항이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허락하는 약만 투여할 수 있음. 병원 진료가 필요하거나 응급 상황 시 아들 한 수 에게 먼저 연락할 것.’ 수는 일 년에 두 번 열리는 센터 행사에 참여해달라는 메일을 받고 센터 계좌로 기부금을 보냈다는 메시지를 원장에게 보냈다. 그게 다였다. 일형은 그사이 여러 채의 집을 스케치북에 그렸고 여러 명의 수가 집 앞에 서 있었다. 검은 머리의 수, 동그란 얼굴의 수에게는 눈코입이 없었다. ‘그리려고 했는데 잘 생각이 안 나서. 우리 수는 잘 있대요?’




일형이 죽던 날 첫눈이 내렸다.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게 눈은 언제부터 내렸는지 모르게. 입맛이 없다고 저녁도 걸렀는데, 501호 기성 씨가 인심깨나 쓴다고 이방 저방에 돌렸던 요구르트병이 입구가 반쯤 뜯긴 채 일형이 누웠던 자리에 쓰러져있었다. 하얗기만 했던 이불에 쏟아진 그것이 꼭 일형의 오줌 같았다. 언젠가 오줌을 지렸다고 희순의 소매를 조심히 잡아당기며 민망한 듯 아닌 듯 웃던 날 하얗다가 붉었다가 하는 일형의 잇몸이 꽃처럼 활짝 개어 보였다. ‘야, 너는 오줌 싸고 뭐가 좋아서 웃냐?’ 희순의 농에 일형이 아이처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열에 들떠 아들 오면 줄 거라고 손에 꽉 쥐고 있던 요구르트가 왜 여기에 있을까. 여현은 요구르트병을 가져다 쓰레기통에 넣었다. 여현의 뒤에서 일형의 방을 보고 있던 희순이 말했다. ‘일형아, 또 보자. 다음에는 우리 좋은 세상에 태어나자. 안 태어나면 더 좋고. 비 안 오고 눈 오니까 좋네. 눈 펑펑 맞으면서 웃으면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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