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3시간

하루 끝 나를 달래는 시간

by 컴피아워 스튜디오


많은 생각을 해야 할 것만 같으면서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피곤한 하루. 5분에 한 번꼴로 시계를 확인하며 오늘 하루가 어서 지나가버리기를 원하는 날. 그런 날에는 제시간에 맞춰 바로 퇴근할 수 있도록 주변을 미리미리 정리해둔다. 머리 쓰는 일은 다음날 나의 깨끗한 책상에게로 미뤄놓고.


누적된 피로들이 겹겹이 몸을 묶고 있어서인지,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평소보다도 더 길다. 눈도 뻑뻑하고, 콧속도 뻑뻑하고, 입안도 깔끄럽고... 이렇게 온몸이 뻑뻑한 그런 날은 마음도 인색해진다. 잔뜩 차게 굳어버린 마음과 정신을 다시 말랑말랑하게 해 줄 무언가가 없을까 계속 생각해본다.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퇴근시간. 도로 건너 강 건너 많은 장애물을 건너 집으로 돌아온다. 출근 전 미처 정리하지 못한 방을 대충이라도 정리하고 일주일치 묵은 먼지를 털어낸다. 또, '바깥의 나'로 하루를 보낼 때 갖고 다니던 '장비'들을 모두 제자리로 돌려 다시 다음 전장으로의 출전을 미리 대비한다. 아침에 정신이 없는 날은 뭔가 하나씩 잊어먹고 갈 때가 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퇴근 후 다음 출근날 입을 옷과 가방 따위를 챙겨두는 편이다.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몸이 알아서 쉴 준비를 한다. 치우고, 정리하고, 곯은 배에 되는대로 무언갈 집어넣고... 십수 년 넘게 지켜온 퇴근 루틴. 마지막으로 뜨거운 물에 감정의 잔여물까지 모두 씻어낸다.


피곤한 밤에는 되도록이면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마무리한다는 것이 인생의 주체성을 놓아버렸다는 뜻은 아니다. 일의 권곤함은 퇴근 후 피곤할 때는 생각지 않는다. 일에 대한 생각은 직장에서, 가장 맑은 정신이 드는 날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에 좋다. 또, 일상에서 쌓인 권태로움에서 파생되는 우울이나 분노의 파도는 아침에는 그 하루를 살아낼 힘의 근원이 될 수 있을지언정 밤에는 그저 자신을 태울 열불이다. 생각하지 않는다. 피곤하면 그저 쉬기로 한다.






샤워를 마친 후 노곤노곤 풀린 몸은 일단 숨부터 제대로 쉬기 시작한다. 하루 종일 입으로 푹푹 내쉬던 한숨 말고, 천천히 코로 들이쉬고 내쉬며 들숨, 날숨을 쉰다.



1.png Time to Rewind © TUW 튜



눕고는 싶으나 바로 잠자리에 들면 언제나 뭔가 조금 억울해, 나는 일명 '무중력 의자'라고 불리는 리클라이너에 눕듯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는 한다. 이 의자는 평소에는 그저 편한데, 피곤한 날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하면 정말 세상에 떠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의자째 빙글빙글 돈다. 눈을 감고 검은 바다 그 어느 한가운데쯤 둥실둥실 표류하는 내 모습을 그릴 수 있다. 술만 안 마셨지 거의 취한 듯한 몸과 마음이다.


목이 마르다.

하루 종일 커피를 부어댄 결과로, 몸도 마음도 건조한 기분. 물을 머그잔 한가득 따라 마신다. 얼음 3개 동동 띄워서 쭉 들이키면 또 그만큼 달다.


마음이 마르다.

마음의 갈증은 얄궂다. 메마른 마음은 자신이 즐거워하고 싶은지, 슬퍼하고 싶은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마치 무언가는 불편한데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아기처럼. 달래주길 바라는 유아처럼. 이제 자야 할 시간이지만 잠들기 싫어하는 어린아이처럼. 잘은 몰라도 아마 위안을 바라는 것 같은 마음에 조금씩 위로를 건네본다.


절절한 글 하나를 읽고 무표정에 눈물 몇 방울을 흘려보낸다. 생동감 넘치는 글 하나를 읽고 무표정에 호선 하나를 더한다. 똑똑한 글 하나를 보고 물음표를 하나 띄우고, 한 이의 인생을 보내는 글에 마침표로 마친다.


잔뜩 메말라 갈라진 논밭에 양동이로 부지런히 물을 길어 나른 수고로, 자신을 비춰볼 수 있을 만큼의 작은 물웅덩이가 생겼다. 표정을 가만히 살피니 어떠하단다. 그에 맞는 책을 한 권 집어 든다. 그에 맞는 음악을 듣기도 한다. 따뜻한 차 한잔을 곁들이기도 한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하는 날도 있다.



보슬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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