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흐린 강릉의 평일 오후, 나와 이쁜 여자는 강릉초등학교 앞 신성춘에 가서 점심을 먹으려고 하다가 실패했다. 가게 앞에 붙여진 종이 한 장에 쓰인 '죄송합니다, 개인 사정으로 임시휴무합니다'라는 주인장의 말이 야속했던 그 흐린 날, 우리에게는 두 번째 계획이 있었기에 그래도 괜찮았다. 배가 고픈 우리의 위장님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얼른 택시를 불러 다리가 불편한 이쁜 여자를 모시고 택지로 향했다.
경포초등학교 근처 밥집과 원룸들이 모여있는 작은 골목에 새하얀 벽면과 밝은 원목무늬의 문, 명패를 붙여 나홀로 다른 세상의 가게인 일본 가정식 겸 주점인 '나나'에 도착했다. 원목으로 된 명패에는 한국말과 일본어로 '나나'라고 적혀있었고 나는 목발을 짚는 이쁜 여자를 위해 나나의 수문장을 맡고 있는 커다란 나무 미닫이문을 밀었다. 장정이 2명은 거뜬히 누워서 잘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문이라 그런지 번쩍거리는 철손잡이를 잡고 당기면서 생각보다 무거운 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낮 12시도 되지 않은 이른 점심시간이라 굉장히 넓은 가게에는 손님은 2팀 정도였다. 밝은 색의 나무로 이루어진 의자와 탁자, 거기에 하얀색의 벽으로 이루어진 곳인데, 하얀 벽 위에는 일본 맥주와 위스키 등을 광고하는 일본에서 건너온 포스터들이 연속으로, 파노라마처럼 붙어있었고 천장 가까이에 매달린 넓은 텔레비전에서는 일본 방송의 뉴스나 예능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어서 내가 강릉의 시내에서 이곳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았다면 나는 일본의 어느 식당에 들어왔다고 착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주방 안쪽까지 가볍게 보이는 열린 주방에 기다란 바 형식의 자리가 있기에 나는 이쁜 여자와 함께 앉아 주문을 한다. 메뉴판의 맨 앞장에는 여사장님께서 한국말이 능하지 않으니 양해 부탁드린다는, 손님들의 편의를 위한 친절한 안내가 쓰여있었다. 나나는 점심에는 닭튀김과 덮밥을 판매하는 식사 위주의 음식을, 저녁에는 다양한 주류들과 안주 형식의 음식을 판매하는 주점으로 영업을 하고 있는 곳이다. 우리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왔기에 점심 메뉴판을 열어서 빠르게 주문을 했다. 나는 기본적인 닭튀김의 맛을 보고 싶어서 일본식 닭튀김 중 하나인 타츠다아게 정식을, 이쁜 여자는 닭튀김에 타르타르소스를 곁들여 먹는 치킨남방(혹은 난반) 정식을 주문했다. 타츠다아게는 잘 알려진 일본 닭튀김인 가라아게와는 달리 튀김의 색깔이 더 밝으며 눈을 뿌려놓은 듯 겉면이 하얀색이라고 나나의 '마스터'는 설명을 곁들여 주었다.
주문이 접수되자마자 식재료들과 튀김용 망을 들고서 조리를 시작하는 남사장님, 그리고 음료를 준비하시는 여사장님. 우리는 나나가 제공하는 다양한 주류등을 구경하면서 나중에 저녁 시간에 또 와보자면서 물 대신에 나온 냉보리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사이 곧 식사가 우리 앞에 나왔다. 작은 그릇에 김치, 일본식 튀긴 연두부, 감자샐러드, 진한 미소시루, 밥, 유자드레싱을 올린 양배추 샐러드, 그리고 닭튀김. 정갈하고 먹음직스러운 일본가정식이다.
나나의 타츠다아게 정식
속초에 살던 시절에 '골목길'이라는 식사가 되는 식당에서 일본식 닭튀김정식을 처음으로 먹었었는데, 당시의 닭튀김정식이 너무 맛있는 와중에 '가정식'이라는 얘기를 듣고 '일본 사람들은 이 맛있는 음식을 '가정식'으로 먹는다고?' 하며 놀랐던 기억이 났다. 과연 '나나'의 닭튀김은 나에게 어떤 맛을 선사할까. 나는 하얀 눈이 묻은 듯한 모습의, 눈꽃이 묻은 닭튀김 조각을 하나 들어서 눈높이로 올린다. 가라아게에 비해서 확실히 얇은 튀김옷의 두께와 옅은 색깔, 기대된다.
바사삭
쫄깃
나나의 타츠다아게, 하얀 가루와 같은 겉면이 특징이다
가라아게가 살짝 두텁고 단단하며 바삭한 튀김옷을 가졌다면, 타츠다아게는 바삭한 것은 가라아게보다는 못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더 얇고 더 부드럽게 씹히는 닭의 튀김옷. 육즙과 쫄깃한 식감이 주는 닭다리의 풍미, 와 이건, 대한민국 치킨의 맛이 평균적으로 좋기는 하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종목의 닭튀김. 얇은 감자칩처럼 씹히는 닭튀김의 겉면, 거기에 얇은 만큼 곧바로, 치아 사이 튀김옷의 부서진 틈 사이로 솟아 나오는 닭다리의 고소하고 진한 육즙. 튀긴 닭고기를 먹을 때, 육즙이 튀김옷과 닭고기 사이로 흘러나올 때, 그것이 내 눈에서도 육즙이 흐를 듯 감동스러운 순간이다. 씹을 때마다 눈을 감고, 바삭한 소리를 귀로 들으며 혀로도 느끼는 풍미와 식감. 아, 이게 닭튀김이지.
"여기 닭튀김 맛있네"
나나의 치킨남방
내 옆에서 삶은 달걀과 마요네즈 등으로 이루어진 고소한 타르타르소스를 올려 먹는 치킨남방을 먹고 있는 이쁜 여자의 반응도 나와 같았다. 아픈 다리가 신경이 쓰이지만 그마저도 잠시 잊을 맛이다. 반찬으로 나온 작은 아게다시토후(일식 연두부튀김)는 숟가락으로 간장까지 한꺼번에 퍼서 한입에 먹어본다. 짭짤하지 않은, 심심하지만 고소한 풍미가 좋은 간장소스에 얇고 쫄깃한 튀김옷. 거기에 달걀이 들어가서 내 취향은 아니지만 매끄럽고 고소한 감자샐러드. 처음에 입안으로 들어왔던 타츠다아게 맛이 워낙 좋았다 보니 그 이후로 맛보는 반찬들도 맛있게 느껴지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내가 직감한 것은 여기 '마스터'분들의 솜씨가 좋고 무엇을 주문하든지 맛이 좋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저녁에 와서 술안주들을 먹으면 그 맛이 어떠할지.
"여기 소스야끼소바 있다, 나중에 저녁에 이거 먹으러 오자."
"그럴까, 저녁에 한 번 더 오고 싶기는 했거든."
"어렸을 때 일본에서 일본식 볶음국수 먹었었는데, 그냥 맛있었거든. 보니까 먹고 싶어 지네."
"그래, 안주에 가볍게 한 잔 하러 오자."
낮의 식사를 마치고 나서 나는 일본인이신 여사장님께,
"고치소사마"라고 했는데,
그걸 들은 이쁜 여자 왈,
"다음에 얘기할 때는 '데시다'를 붙여, 그냥 그렇게 얘기하면 반말이잖아. 잘 먹었 '습니다'라고 해야지."
"아.. 그렇구나."
이쁜 여자가 얘기해주지 않았다면 사장님과 초면에 반말을 한 이상한 손님인데, 그 이후로도 계속 반말로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하는 무례한 손님이 될 뻔했다. 맛있게 잘 먹었으니, 그 인사를 하고 싶었던 comma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여름으로 넘어가고 있던 주말의 저녁이었다. 마침 날도 선선하기에 도수가 낮은 시원한 알코올 음료에 안주를 먹으면 좋겠다 싶어서 이쁜 여자와 다시 나나로 향했다. 이번에도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식사를 하기에는 이른 시간, 오후 5시였으니 이제 막 나나는 술집으로의 전환을 마친 이른 저녁 시간이었다.
드르르륵
우리는 커다랗고 두꺼운 나나의 나무 미닫이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섰다. 점심을 먹었을 때와 같은 그 자리, 부엌 앞의 바 자리에 앉아 소스야끼소바와 햄까츠를 주문했다. 소스야끼소바는 대략 알싸한 향이 맴도는 데리야키 소스에 볶아낸 메밀국수라고 생각이 드는데, 햄까츠는 햄을 튀김옷에 입혀 튀겨낸다고 하니 무슨 맛일지 궁금해서 시킨 음식이었다. 일본어로 가득한 포스터와 소리를 들으며 찬 보리차를 마시며 이쁜 여자와 앉아있으니 우리가 한국의 강릉이 아니라, 일본의 어느 도시 술집에 들어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다, 나는 '먹어서 세계 속으로'를 사랑하니까.
나나의 청귤사와
손님은 아직 우리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음식은 굉장히 빨리 나왔다. 소스야끼소바는 잘 구워진 달걀프라이가 올라간 볶음 국수, 약간의 겨자향이 알싸하게 느껴지는 짭짤하고 시큼한 맛의 데리야끼 소스를 묻힌 국수가 후루룩 목젖을 스치며 지나간다. 햄카츠는 일반적인 햄 사이에 치즈를 넣어서 조금 더 맛있게 햄을 튀겨낸 것인데, 튀김옷이 얇으면서도 매우 단단할 정도로 바싹 튀겨져 있었다. 단단하고 바삭한 튀김옷과 부드러운 햄과 치즈,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나나의 소스야끼소바
"여기 사장님은 뭐든 잘 튀기시네, 저번에 타츠다아게랑 연두부튀김도 맛이 좋았는데, 역시."
아직은 회복 중이라서 술을 못 먹는 이쁜 여자는 생강맥주를 마시고, 나는 청귤청이 일본식 소주에 섞인 청귤사와를 시원하게 마셨다. 나는 워낙 알코올을 잘 못 마시기에, 내 얼굴이 금방 얼큰하게 달아오른다.
나나의 햄카츠
'이 얼굴로 저 하얀 벽에 서 있으면, 내 얼굴과 벽이 일장기처럼 보이겠군.'
쓸데없는 생각이 지나가는 찰나, 메뉴판에서 내 눈에 들어와 호기심을 끄는 음식, 붓가케우동. 양념간장에 차가운 우동면을 넣어 비벼 먹는 일식 우동이다. 지금까지 먹은 요리들의 맛을 생각해 봤을 때, 왠지 모르게 이 붓가케도 상당히 맛있게 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저녁시간으로 향해 갈수록 점점 나나에 들어오는 손님들이 한, 두 팀 씩 늘고 있었다. 빨리 먹고 가고 싶다면 지금 주문해야 한다.
"마스터, 여기 붓가케 우동 하나요."
"붓가케 우동 하나요~"
내가 예상했던 대로 우동이 찰박찰박 물에 헹궈지는 소리와 함께 면요리는 금방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나나의 아게다시도후와 같은 양념간장의 풍미가 코로 올라왔다. 수북한 튀김조각과 다진 대파가 굵직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우동면들 위를 장식한 붓가케.
"나는 이렇게 튀김조각들이 산처럼 쌓인 음식 좋더라."
그리고 신나는 마음으로 젓가락을 들어 다진 파와 튀김조각, 간장소스와 면을 조심조심, 비벼가며 붓가케의 양념간장에서 올라오는 고소한 참기름의 냄새에 리듬을 타며 냉우동을 비비는 나. 우동이 다 비벼졌으니 면을 푸짐하게 들어 입안으로 가져간다.
나나의 붓가케우동
후루루루룩
심심하지만 고소하고, 참기름의 향이 향기롭다. 우동면은 찬물에 잘 씻어 나오니 쫄깃하고 찰랑거리는 식감이 훌륭하다. 작은 가게라서 면이나 일본간장을 직접 만드셨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궁금하니 마스터에게 묻는다.
"사장님, 이 쯔유는 직접 하시는 건가요?"
사장님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한다,
"아니요, 저희가 기성 쯔유를 갖고 와서 저희 식대로 소스를 만든 거예요."
이 손님이 무슨 의도를 갖고 질문을 한 건지 살짝 걱정과 당황스러운 기운이 얼굴에 묻어나기에 나는 웃으며,
"아, 맛이 좋아서 물어봤어요. 붓가케 맛이 좋네요."
사실이다, 맛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런 말이나 질문도 없이 깨끗하고 조용하게 다 먹기만 했을 것이다. 만족스러운 식사와 술을 마신 나와 이쁜 여자는 일본인이신 여사장님께 가서 결재를 하며 말한다.
"고치소사마... 데시다, 도테모 오이시 데시다!"
'잘 먹었습니다, 매우 맛있었습니다'를 어색하고 옳지 않은 일본어로 건네자 여사장님은 방긋 웃으며 한국말로 감사하다고 하신다. 정말 맛있게 먹었는데, 나의 진심이 전달되었으려나. 저녁 시간이 늦어질수록 점점 나나에 들어오는 손님들이 많아지고 있기에 오후 8시가 넘어서 이곳에 오면 우리가 경험한 조용한 식당이 아닌, 더 왁자지껄하고 시끄러운 일본 술집이 되지 않을까 상상을 하며 나나를 나왔다. 오래오래 장사하시길, 다음번에는 하이볼에 삼겹살조림에 고구마튀김을 먹을까나. 오이시이모노,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마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