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고대했고 기다리던 그러한 날이었다, 나와 그의 휴일이 일치했던 어느 날 좋은 겨울 1월의 평일. 우리는 오늘은 어떠한 맛난 음식들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시간을 보낼까 꿈꾸며 햇살 따땃한 10시를 출발했다. 아직도 구석구석에는 지난 크리스마스에 내렸던 눈의 자욱들이 남아서 그래도 지금은 겨울이라는 것을 알렸지만 그런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오로지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그와 나의 의지 앞에서는 말이다.
황송하게도, 내 옆에서 지긋이 하얀 SUV의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운전을 하고 있는 그는 강릉 혹은 전국적으로 이름이 난, 강릉의 어느 로컬 피자집 'ㅅㅁㄹ'의 대장을 맡고 있는 귀한 분이다. 나는 그가 운영하는 피자집의 단골손님으로서 피자와 음식에 대한 다양한 얘기들을 나누고 들으면서 친분이 생겨 서로가 함께 미식 여행을 다니면 즐겁지 않겠냐는 제안으로 작년부터 우리의 정기적이고 미식만을 위한 당일치기 미식 탐방은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자신만의 피자의 길을 개척해나가며 이제는 'named'가 된 피자 장인과 음식과 미식문화, 그 자체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단골손님의 우정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생각해도 꽤 흔치 않은 관계다. 나는 그를 강릉의 이름난 '피자대장님'이시기에 '대장님' 혹은 '사장님'이라 부르고, 그는 나의 필명 그대로 'comma님'이라고 부르는 수평적인, 동등한 관계. 적어도 나는 환영하는 이상적인 그런 관계.
이번에 가려고 하는 곳은 대장님과 내가 처음으로 강릉의 맛집이 아닌 속초에서 내가 추억 속에 간직하고 있는 맛집 중에 하나인 (그렇다, 내 추억 속의 맛집들은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 사라지지 않은 그러한 집들 중 하나이다) 2대에 걸쳐서 운영하고 있는 즉석 떡볶이 집이다. 밀떡, 어묵, 쫄면, 양배추, 양념, 육수 등으로 조합이 된 아주 단순한 옛날식 즉석 떡볶이 집이지만 내 기억 속에서는 그 집의 육수는 간이 슴슴하면서 감칠맛이 넘치는 독특한 떡볶이 육수가 잊혀지지 않기에 속초와 고성을 자주 가시는 대장님이시지만 (다행히 대장님은 가본 적이 없으셨다) 내가 인도를 하여 같이 가려고 한 것이다.
점심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그는 빠르게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차를 몰았고 우리는, 역시나 피자와 음식과 맛집 등등에 대한 얘기로 입에 시동을 걸면서 이윽고 속초에 도착했다. 지난가을에 방문했었던 때와는 달리, 지난번보다 훨씬 더 번듯번듯한 건물들이 하늘을 긁으며 우뚝 서있는 속초는 여러 외식업소들이나 카페들이 섰다가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관광도시이지만 나에게는 언제 가도 추억 속에 서있는 친숙한 도시. 아파트들이 성냥갑처럼 서있는 속초 교동의 언덕들을 가로질러 속초초등학교를 지나서 붉은 간판에 초록색 문자가 인상적인 간판을 가진 그 즉석 떡볶이 집에 도착하니 어라, 이게 아닌데. 일주일에 일요일, 단 한번 쉬는 가게이지만 가게의 유리문에 투명테이프로 붙여져 스산하게 펄럭이는 주인아주머니의 공지
'개인 사정으로 오늘은 쉽니다, 내일 수요일에 열게요'
그 문자를 본 대장님과 나는 거의 동시에 '아아....'라는 외마디 비명과 탄성을 내지르고, 나는 잠시 내 이마를 덮었다. 어, 이거는 내 예상에는 없던 건데. 어이없다는 너털웃음을 터트리시던 대장님은 그 잠잠한 저음으로
"차선책을 찾아보죠"라고 말하시며, 그와 동시에 나와 그는 신속하게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근처의 우리의 여행 취지에 알맞은 음식점들을 검색했다. 그 와중에 빠르게 나의 머릿속에 내가 고성에서 군생활을 하던 동안에 곧잘 갔었던 고성식 막국수 (이북식 동치미 막국수) 전문점들에 대한 기억이 스쳐갔고 대장님께 말했다.
"우리... 백촌 막국수 가실래요?"
이미 속초로 오면서 내가 속초와 고성에서 있던 맛집들에 대해서 얘기를 하다가 속초와 고성에는 막국수집이 강릉에 짬뽕 혹은 장칼국수집 많은 것처럼 널렸다고 하며 그중에서 유명한 곳이 몇 있는데 '백촌 막국수'가 제일 유명한 집이라고 말씀을 드렸던 것이 있어, 대장님은
"comma님이 말씀하시는 곳이면 의심할 것 없죠, 가시죠"
라고 하시며 우리는 다시 맛집으로의 여정을 떠난다. '백촌면'은 강원도 고성에 있는 곳인데, 속초와 고성의 경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동네다. 백촌면에 동치미 막국수집이 '백촌 막국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강원도 고성의 '백촌 막국수'하면 전국적으로 한국의 면 음식을 좋아하는 면 애호가들이라면 한번쯤은 다들 들어본 곳이며 면 애호가 동아리에서는 전세 버스를 대절해서 방문하기도 하는 고성을 방문하는 식도락가들이 꼭 들리는 막국수집. 메밀껍질까지 다 들어간 통메밀의 메밀면을 쓰는 편이고, 한국에서 이북식 막국수를 먹을 수 있는 대표적인 두 곳 (춘천, 고성) 중 하나답게 달큰하고 짭짤하며 시원하고 물처럼 맑으며, 숭덩숭덩 네모 낫게 잘린 무만이 들어간 동치미가 사람들의 입맛을 끄는 곳. 백촌면에 들어서니 무언가가 있었던 공터는 넘치게 방문하는 손님들을 그 앞마당만으로는 다 감당치 못했던 백촌 막국수에서 매입한 주차장이 되어있었으니, 그곳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 들어가니 나의 군생활 중에 방문했었던 기억이 떠오르는 근대식 기와의 시골집이 등장한다.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때까지만 해도 별 반응이 없던 대장님, 식당 안의 넓은 공간과 테이블에 가득 앉은 손님들의 수를 보고는 눈이 커지신다.
처음 방문하는 대장님을 대신하여 여러 번 방문을 해봤던 내가 주문을 대신한다, 그래 봤자 어차피 메뉴는 막국수와 수육 밖에는 없지만 말이다.
"대장님, 여기서는 수육을 꼭 먹어야 합니다. 무조건이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곳 백촌막국수에서 정말로 꼭 먹고 가야 할 것은 백촌 막국수에서 투박하게 내어오는 수육삼합이다. 나는 이북식 막국수가 어떻게 '막국수'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동치미 막국수가 원래 '김치말이 국수'라는 듣고 보았던 정보들을 주절거리며 음식이 나오기를, 허기진 배를 붙잡고 대장님과 기다렸다.
백촌 막국수의 수육. 백열무김치, 명태식해 그리고 백김치와 함께 나온다.
이전에 들은 바로는 백촌 막국수에서는 부드럽고 육질 좋은 암퇘지 앞다리만을 사용한다고 들었었는데, 두툼하고 말캉거리는 두꺼운 비계가 그를 증명하는 듯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수육을 내가 '삼합'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냥 먹는 것보다는 함께 나온 반찬들로 삼합을 만들어 먹으면 훨씬 맛있기 때문에. 매콤 달콤하고 쫄깃한 명태식해와 심심하고 아삭한 백김치를 수육에 싸서 3겹을 만들어 먹으면 부드럽고 쫄깃하고 아삭한 식감들과 달고 짭짤한 그 맛들이 입안에서 어우러진다, 입에서 씹히는 거칠거칠한 명태의 달달함에 이어 부드럽고 녹는 듯한 돼지고기의 기름진 식감, 그리고 상큼하고 아삭한 백김치의 마무리. 아, 글로는 그 맛을 다 담지는 못하겠다, 직접 먹어본 사람은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이러하다. 입안에 넣고 눈을 살짝 감으며 씹으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 맛. 그렇게 먹고 있는 나를 보며 대장님도 사진을 한번 찍으시더니 따라 드신다, 그리고 대장님도 나와 함께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시며 웃으신다.
"여기 진짜 찐이네요"
"그렇죠? 이 돼지고기 윤기 좔좔 흐르는 것 좀 봐요."
"그리고 이게 작은 그릇에 쌓여 담아서 그렇지, 양이 꽤 많아요."
"더 마음에 드는 것은 살이 참 두툼하다는 거예요, 씹는 맛이 일품입니다. 삼겹살이 아닌 전지로 하는 것 같은데 이러한 기름진 맛과 부드러운 육질은 이 고기를 삶은 분에게 박수를 쳐줘야 하는 거죠."
그렇게 말없이 수육과 반찬들로 삼합을 만들어 먹고 있으니 우리가 기다리던 주인공 막국수를 빛내기 위해 커다란 스테인리스 대야에 동치미가 등장하고 면이 이어서 나온다.
영동지방에서 동치미 막국수를 한다는 집들은 대부분 동치미와 메밀국수를 따로 주는데, 가게마다 달라서 항아리에 담아주는 집도 있지만 백촌 막국수처럼 커다란 스테인리스 대야에 담고는 무를 썰어 넣는 집도 많다.
"자, 동치미가 나오면 일단 동치미 맛을 봐야죠?"
내가 국자를 들어 옆에 쌓여있던 종이컵을 뽑아 반 정도 담아 원샷으로 입에 붓는다. 짭짤한 첫맛, 달달한 중간맛, 시원한 끝 맛, 깔끔하다. 단맛을 내기 위해서 사이다를 넣기도 하고 뉴슈가를 넣기도 하는 등 집마다 그 요리법은 다르겠지만 맛있는 동치미를 먹으면 그만인 나에게 그런 것은 상관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내 눈앞의 동치미가 맛있다는 것이다.
"크으으으......"
나의 그 말 한마디에 대장님도 의심하지 않으시고 종이컵으로 동치미를 떠드신다, 다시 원샷, 그리고 나를 보며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말이 필요 없는, 그런 맛이다.
"시작하시죠."
"네, 본격적으로 부어볼까요."
내가 선호하는 막국수의 메밀면은 통메밀을 쓰고, 굵으며, 찹쌀이나 밀가루를 살짝 섞어 넣어 찰기가 약간 있는 형태의 메밀면을 좋아하지만 그 면발이 어찌 되었든 동치미가 맛있는데 '메밀 면발 is 뭔들'. 젓가락으로 메밀 면발을 잡아 말아 올려 입안에 욱여넣고 아주 살짝만 씹고는 목으로 넘겨 메밀면의 그 까끌거리는 식감을 느끼고 동치미 맛을 잊을세라 다시 동치미를 입안에 가득 넣고 동치미 무를 또 넣어 씹는다. 시원하고 달큰한 그 동치미 육수의 잔미 사이로 아삭 거리며 슴슴하게 간이 된 무가 나의 입을 심심치 않게 지켜준다.
"여기 진짜 찐 막국수네요. 아까 밖에서 주차장으로 들어올 때만 해도 사람이 없는 것 같았는데 들어와서는 사람이 가득한 것을 보고 놀랐거든요. 그리고 이 수육, 안 먹으면 후회할 뻔했네요."
나는 먹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막국수를 순식간에 목구멍으로 흡입했다, 밀어 넣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수육삼합, 막국수, 동치미 그리고 곁들여져 나온 열무김치. 추운 곳에서 살던 우리 조상들은 메밀로 된 음식을 밤참으로 가볍게 드셨겠지만 이 시대에 와서는 그것들마저 식문화의 일부가 되어 '밥심'으로 사는 민족의 별미가 되니, 그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 같은 자칭 미식가로서는 좋은 곳으로 잘 가시라고 큰절을 곱게 두 번 올릴 일이다.
고성, 춘천에서 먹을 수 있는 막국수는 메밀면에 동치미를 부어먹는 단순한 음식이지만 그 안에 담긴 조상님들의 이야기와 이북식의 음식을 우리가 어떻게 먹을 수 있게 된 것인지는 단순하지 않다. 쌀이나 밀과 같은 주요 곡식들을 재배하기 힘들었던 척박한 땅에서 겨우 키워낸 메밀과 고랭지를 활용해서 얻어낸 무, 배추 등으로 담근 동치미로 음식을 해 먹던 북녘 땅의 조상님들. 그들이 먹던 음식은 식문화의 특성으로 여러 지역에 퍼져 오다가 한국전쟁을 계기로 남녘땅에 내려오신 분들에 의해 더 정확한 요리법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이건 내 추측일 뿐이지만 전쟁의 화마를 피해서 북쪽에서 남으로 내려오신 분들은 이 메밀로 된 막국수를 볼 때에 감회가 새로우시지 않으실까. 평양냉면이나 함흥냉면, 거냉 등이 그러한 것처럼.
그렇게 조상님들이 즐기던 밤참의 추억은 오늘날 우리의 별미가 되어 기쁨을 선사한다. 맛있는 추억, 감사히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