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스타 친구로 인하여 드립 커피의 향긋한 세계에 입문을 하게 된 이후로 이젠 아메리카노라는 미국 문물에는 거의 혀의 1인치도 빠트리지 않는 인간이 되어버린 나와 이쁜 여자가 항상 찾는 종류의 커피는 진하고 깔끔하며 향긋한 카페인 음료. 드립 커피를 찾다 보니 이제는 커피음료를 만드는 원액인 에스프레소도 곧잘 마시는 극소수의 인류가 되어버린 우리에게, 그나마 커피로 유명한 강릉은 선택지가 적지 않게 있는 도시이다.
평범한 아메리카노나 라테는 우리의 예상 메뉴에 존재하지 않는다, 싱글 오리진으로 촉촉하고 느긋하게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그러한 한 컵만이 우리의 만족도를 충족시키는 그런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강릉의 월화거리, 팔각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새로운 카페가 열렸고, 그곳이 에스프레소를 주 메뉴로 취급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가슴을 커피 2, 3잔을 연거푸 들이킨 것처럼 두근거리게 했다.
우리가 자주 가는 이탈리안 간식집 '로 스푼티노 (Lo Spuntino)'에서 아란치니를 먹으며 사장님께 새롭게 강릉에 자리를 잡은 에스프레소 카페 Pumpkin Owl (펌킨오울)에 대해 다시 얘기를 하며 바로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처음 이 펌킨오울에 대해 이야기를 전해준 사람은 갤러리 겸 편집샵인 '오어즈(Oars)'의 사장님 내외셨다. 그래서 마음속에 '한 번 가봐야지...'라고만 갖고 있다가 이왕 시내에 나온 김에, 집에 돌아가는 길이기도 하니 들렸다가 가자....라고 생각하여 우리는 발걸음을 향했다.
강릉에서 장칼국수로 유명한 ㅎ칼국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원래는 족발집이었는지 무슨 가게였는데 그 가게가 조용히 나가더니 이런 가게에 들어오게 될 줄은 많은 사람들이 몰랐을 것이다. 새롭게 열리는 카페에 호기심과 기대를 품고 사람들이 몰려오듯이 귀여운 올빼미가 빵과 에스프레소 잔을 잡고 날아다니는 그 광고가 걸린 에스프레소 카페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미 이곳에서 미트파이를 한다는 얘기를 들은 나의 머릿속에는 빠르게 주문할 메뉴들의 목록이 작성되고 있었다.
미트파이, 거기에 표고버섯으로 맛을 내는 수프, 그리고 마무리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깔끔한 마무리. 바에 앉아서 부엌과 요리하는 사장님들의 모습을 보기 좋아하는 나를 따라서 나와 이쁜 여자는 카운터 근처의 바 의자에, 주문 후에 앉았다.
나는 미트파이를 좋아한다, 손바닥만 한 패스츄리 옷을 입고 그 안에 육즙과 육향이 넘치는 갈려진 고기 혹은 고깃 조각들이 가득하다 못해 넘칠 것처럼 일렁이는 속을 가진 아담하지만 든든한 미트파이. 대한민국에서 간단한 식사를 위해 삼각김밥이나 컵라면을 먹듯이, 내가 유학을 했던 호주에서는 편의점에서 미트파이나 기다란 소세지롤에 토마토소스 (맞다, 케첩이다)를 곁들여 먹는 것이다. 미트파이를 모든 사람들이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고기만 가득한 음식이다 보니 느끼하거나, 너무 무겁다며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나는 이 육즙과 고기가 흘러넘쳐 입안에서 구수하고 기름지게 나를 채워주는 이 음식을 사랑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한국의 편의점에는 미트파이가 없다. 대한민국은 영국이나 호주가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미트파이를 먹고 싶지만 먹을 수 없는 현실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체념하며 살고 있었는데, 강릉에 드디어, 미트파이라니!
(사실 미트파이 등의 파이류를 취급하는 곳이 아직도 임당 문화의 거리에 있기는 하지만.... 이하 생략, 그 외에 안목에도 미트파이를 판매하는 곳이 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미트파이와 표고버섯 수프를 주문했다. 에스프레소는 미리 주문하면 식을 것이 분명하니 식사가 거의 마쳐질 즈음에 주문할 생각인 것이다. 앞에 이런저런 주문이 많은지 전신에 펼쳐진 문신이 멋진 바리스타님과 아내분께서는 에스프레소 머신과 주방에서 각자의 주문을 가능한 빠르게 진행하고 계셨다.
"주문하신 미트파이와 하우스 수프 준비해드릴게요"
청아하고 밝은 아내분의 목소리와 함께 우리가 주문한 음식이, 까맣고 반질거리는 재질의 바 위로 미끄러져 나왔다.
내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큼직한 미트파이 조각에는 직접 만든 것으로 예상되는 라구 소스와 곱게 으깨져서 라구를 받쳐주는 으깬 감자가 가득 들어있었고 겉의 파이는 짙게 구워진 갈색으로 노릇노릇한 냄새를 뿜어내었다. 그 옆에 파마산 가루가 눈처럼 흩뿌려진 옅은 베이지색의 수프에서는 듬성듬성 검은색 점들이 보이며 독특한 표고버섯의 향을 올라온다. 구미를 당기는 모습이다, 어떤 맛일지 궁금한 모습.
파이는 손으로 먹는 것이 일반적인지라 손으로 먹으려고 했는데 안에 가득 담긴 고기와 감자가 흘러내릴 것 같아서 처음은 포크로 썰어서 먹는다. 파이와 라구, 으깬 감자를 포크 위로 잘 쌓아서 입으로 넣는다, 입을 담고 눈을 감았다.
담백하고 온순하지만 토마토의 감칠맛과 라구 특유의 고기 풍미를 잃어버리지 않은, 함께 곁들여진 향신료의 향과 맛도 그러한, 듬직하고 진한 라구 맛이 입안에 가득 찬다. 라구의 고기와 토마토의 풍미가 코끝까지 스멀거리며 나의 얼굴을 가득 채운다.
"으으으음....."
감았던 눈을 차마 뜨지 못하고 그대로 미소를 지으며 나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인다.
"합격이구나?"
옆에서 그러한 내 모습을 보고 있던 이쁜 여자도 기쁘게 파이를 포크로 썰어내어 입으로 넣는다, 기본적으로 짭짤한 음식을 좋아하는 그녀의 입맛에도 간이 적절한지
"오, 맛있어"라고 감탄하며 파이를 한 조각, 한 조각씩 썰어 먹기 시작한다. 앞으로 그녀는 '미트파이'라는 음식에 대해서는 좋은 인상을 간직하고 접근하게 될 것이다. 미트파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기쁜 일이다.
향긋한 라구소스와 고기에 이어 부드럽고 심심한 으깬 감자의 맛이 균형을 이룬다. 맛의 균형이 한쪽으로 치우쳐질 수 있는 것을 방지하는 필수불가결의 탄수화물. 그래서 그런지 감자와 고기를 함께 익혀서 먹는 영국의 셰퍼드파이가 많이 생각나는 파이다. 거기에 적절히 바삭하고 단단한 파이 옷이 재료들이 흐트러지지 않게 모양을 잡아주니 파이의 중심으로 갈수록 부드러워서 쉽게 부서지던 모양 때문에 손으로 잡고 먹을 수 없었던 파이를 중간부터는 한 손으로 잡고 피자 먹듯이 먹었다.
먹으면 먹을수록 라구의 진한 고기, 토마토의 감칠맛과 감자의 부드러움, 그리고 각 재료들의 무거운 질감이 입안에 중첩되며 얼굴 전체가 향긋해지는 기분이다. 라구는 이미 첫 입을 먹을 때부터 기성품이 아니고 직접 만드신 것을 확신했기에 이 라구를 만들기 위해 매일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실 모습이 눈에 선했다.
표고버섯이 주재료인 하우스 수프의 경우 간은 심심하고 담백해서 나의 입맛에는 아주 잘 맞았지만 이쁜 여자의 경우, 소금을 더 넣어서 먹어야 하는 맛이었다. 하지만 각 재료들이 매우 곱게 갈려서 우유, 크림 등과 어우러진 그 맛이 고소하고 부드러우며 표고버섯의 향미가 혀에 닿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서 한번 숟가락을 뜨기 시작하니 멈추기가 어려웠다. 나는 크림이 들어간 양송이수프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그와 친척 관계인 수프를 먹으니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담백하고 심심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부드럽고 고소하며 향긋한 식감이 섞이니 강렬하거나 독특한 맛이 없어도 심히 중독적인 맛을 가진 수프다. 거기에 그 위에 조금씩 흩뿌려주는 파마산 치즈가루가 약간의 짠맛과 고소함을 더 더해주고, 바삭한 식감까지 선사하니 미트파이와 더불어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다.
미트파이가 너무나 맛있기에 나는 한 손으로 집고서 와구와구 먹다가 마침 주문을 하러 카운터로 나와 계시던 여사장님과 눈이 마주쳐, 나를 휘둥그레 쳐다보시기에 나는 파이가 심히 맛있다는 표현을 하며 가능한 밝은 눈웃음으로 답해드렸다.
그러던 중, 오븐에서 여사장님이 커다란 빵 덩어리를 꺼내는 모습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부엌에서부터 달달한 마늘 버터의 냄새가 퍼지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빵푸딩이다, 빵푸딩, 저거 무조건 맛있어, 저거 먹어야 돼."
"빵푸딩?" 이쁜 여자가 되묻는다,
"빵을 엄청 부드럽고 촉촉하고 달달하게 구워서 푸딩 같다고 해서 빵푸딩인데, 저거 봐, 마늘 버터를 넣어서 단맛을 가미했으니까 맛이 없을 수 없어. 그리고 갓 나온 거니까, 무조건 먹어야 돼."
호주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에 카페에서 곧잘 먹었던 빵푸딩, 영어 이름도 그대로 'Bread-Puding'이다. 달콤하고 푹신하며 부드러운, 빵으로 푸딩의 질감처럼 구워내는 후식. 호주를 떠나온 이후로는 먹어볼 일이 없었는데 펌킨오울에서 이 빵푸딩을 볼 수 있을 줄이야. 눈물 나도록 기쁜 것이다. 나는 바로 계산대로 달려갔다.
"선생님, 이거 지금 파시는 건가요?"
"네, 바로 드릴까요?"
"그럼요, 한 조각만 부탁드립니다."
"네~ 바로 준비해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평소에도 예의가 없는 사람은 아니지만,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더더욱, 한없이 공손해지는 나다. 나는 내 눈앞에서 모락모락 김을 내쉬며 조각으로 나뉘어 있는 빵푸딩을 보며 10년 전 호주에서의 기억에 감상에 잠시 젖었다. 어느 빵집에서 우연히 먹었던 그 부드러움과 푹신함, 그리고 달콤함.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기억은 마늘 버터가 더해져 내 눈앞에 살아있는 것이다, 강릉의 펌킨오울에서.
달달한 냄새, 거기에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좋아하는 마늘의 향과 맛, 큼직하며 가죽소파처럼 푹신해 보이는 겉면. 버터와 설탕으로 반짝거리며 빛나는 빵푸딩이 나를 부르고 있다. 응답하는 것이 인지상정, 도리이다.
포크로 한 조각을 크게 잘라내어 입에 넣고 다시 닫는다. 푹신하고 달달한 빵의 맛이 치아 사이로 들어오며 마늘향과 버터의 부드러움이 이어진다. 라구와 감자의 풍미로 가득했던 나의 얼굴은 이제 달콤한 버터로 가득하다. 씹을 때마다 마늘 버터와 당분의 달콤함이 부드럽고 쫄깃한 빵의 결 사이로 새어 나온다.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인다.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까지.
그리고 한입을 하기 전에 다시 심호흡을 한다. 빵푸딩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다, 깊은 숨을 쉬게 만드는 빵이다. 최대한 입안에서 그 식감과 맛을 오래 느끼기 위해, 이 빵푸딩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달콤함과 부드러움을 거의 완벽하게 즐겼으니 이제 깔끔함과 쌉쌀함으로 식사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우리는 기본적인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펌킨오울에서는 에스프레소에 각으로 된 갈색 설탕과 끝마무리용 탄산수를 함께 제공한다.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이에 대한 배려. 나와 이쁜 여자는 숟가락에 올려진 각설탕을 에스프레소에 넣으면서 몇 마디 나눈다.
"이탈리아에서는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나서 남은 이 설탕 결정들의 모양을 보고서 점을 치기도 한데."
"그래? 그 뭐지, 차를 마시고 나면 남는 차 찌꺼기나 커피가루의 모양을 보면서 점을 치는 거랑 비슷한 건가."
"그런 셈이지."
이탈리아에서 실제로 그렇게 하는지, 안 하는지는 상관이 없다. 그저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나서 설탕 결정으로 점을 치는 시늉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는 놀이가 된 것으로 만족하니까.
에스프레소는 역시나 기대한 맛이다. 강렬하며, 원두의 풍미가 가득하고, 쌉쌀하며 깔끔하다. 갈색 설탕이 전달하는 약간의 단맛도 사이사이에서 커피의 쓴맛을 지루하지 않게 해 준다. 만족스럽다, 빠르고 확실하게. 이렇게 빠르게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나니 녹지 않은 설탕 결정들이 반짝거리면서 에스프레소 잔 바닥에 남아있다.
"바닥에 남은 설탕 결정들이 뭐래? 바닥에 남아있으니 밑바닥 인생이래?"
"아니, 반짝거리는 설탕 결정들처럼 우리 인생도 반짝이면서 빛이 날거래."
이쁜 여자와 나는 깔깔거리며 웃었고 처음부터 설탕 결정으로 점을 치는 것에 대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바리스타 겸 사장님도 함께 크게 웃으셨다.
그 이후로도 나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함께 일하는 균과도 펌킨오울에 점심을 먹으려고 방문했었다. 추석이 지나고서 혼자 직장 근무 중 점심을 먹으려고 방문했을 때, 여사장님께서는 나에게 이런 말씀을 건네셨다.
"손님이 오실 때마다 제가 기분이 너무 좋아요."
그러한 말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 나는,
"저는 맛있는 곳만 가거든요."하고 함께 웃었다.
기분 좋으라고 해드린 말이 아니다. 그저 사실을 얘기해드린 것뿐이었다, 나는 나에게 맛있는 곳만 가니까.
펌킨오울이 강릉에서 오래도록 장사하기를 바라며, 이번 주는 또 언제 에스프레소를 먹으러 갈까 하는 궁리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