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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나 Oct 18. 2024

단편소설- 금아롬이 [4]

공연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박한기는 벨루티 타이핀을 타이에 정성스럽게 꽂았다. 가르마를 타서 머리를 넘긴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가 기댄 차창 너머 로미의 실종 전단지가 구청장 후보 포스터 위에 덧붙여진 게 보였다. 사진을 보면 볼수록 누군지 알 수 없어졌다. 무심결에 저 아이가 유정에게 아는 척을 하면, 너 누군데, 라고 할지도 모른다.


박이 그녀의 손등을 두드리자 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 기운이 감돌았다. 형제애나 자매애와 비슷한 지점에 있는 농도 짙은 기운이. 영화감독과 페르소나, 지휘자와 오페라 싱어 사이의? 촬영과 공연을 앞둔 긴장을 필연적으로 공유해야하는 관계 말이다. 박은 유정을 바라보았다. 접합부분이 선명하게 보이는 아크릴 진주 귀걸이를 했다. 전날과 같은 원피스를 입었고 무릎에는 보세가게에서 산 켈리 스타일 가방과 복숭아 인형이 놓였다.


가방은 누가 보아도 카피였다. 가방이 가짜였기에 유정은 진짜 같았다. 터널에 진입하자 붉은 빛이 레자 가죽에 반사되어 구불거렸다. 레자. 형편없는 비닐. 그는 몇 달을 기다려 에르메스의 켈리 백을 받고 거울 앞에 선 사람들 중 가짜 같은 이를 수 없이 보았다. 도미니카 출신의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몸에 걸친 옷의 값이 제 몸값을 초월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옷값은 제 역할을 하지도 못하고. 터널을 지나자 오후 2시의 해가 창을 통과해 유정의 얼굴에 굴곡을 드리웠다. 그녀가 창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4월인데도 입김이 길게 솟았다.


라이브 홀 앞에 벌써 사람들이 모였다. 로미를 흉내 낸 아이들. 탈색을 하고 귀가 빠지도록 육중한 귀걸이를 한 아이들은 어느 무리에나 있었다. 아이들이 왜 추운 날에 로미처럼 꾸미고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인쇄기가 고장 나 같은 그림이 반복 출력된 종이를 보는 것 같았다. 잉크농도에 따라 색이 달라지듯 아이들도 그랬다. 좀 더 비슷한 로미, 덜 비슷한 로미, 진짜 같은 로미, 너무 닮아 무서운 로미, 로미가 아닌 로미. 차가 속도를 내자 여러 명의 로미들이 동시에 덧게비쳤다. 


대기실로 향하는 길에는 들뜸과 소음과 #findromyandpete 해시태그가 공중에 둥둥 떴다. ‘소녀들의 시간’ 멤버 레아 양이 태그가 새겨진 아크릴 통을 들고 군중들 사이에 섰다. 팬, 실종자를 가족으로 둔 사람, 동네주민, 셀러브리티가 로미를 위해 옅은 노란색 종이에 메시지를 적어 통에 넣었다. 로미의 굿즈를 만들어 파는 천막 사이로 뮤지션지망생들이 버스킹을 했다. 투명한 하늘을 향해 여러 개를 한데 묶은 치자색 풍선이 올랐다. 로미와 피트의 얼굴을 인쇄한 현수막이 바람을 맞는 소리가 났다. 


-나 왜 들뜨지.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목을 긁자 손톱 모양대로 자국이 생겼다. 


-세 곡 뒤 무대로 올라가요. 여권은 무대에서 레아가 전달해 줄 거예요. 


유정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누군가 차문을 열었다. 매끄러운 보도블록에 햇빛이 비춘 탓에 한동안 세상이 검게 보였다. 그녀는 눈 먼 사람처럼 박에게 부축당해 건물로 향했다. 시력이 제대로 돌아왔을 때엔 차가운 색조의 벽면과 바닥재로 이루어진 푸른빛 복도가 보였다. 병원이나 시체 안치실 같은 채도의.


-피트 아버지가 막 루앙프라방에 도착 하셨답니다. 우린 내일 출국 예정이에요.


박한기가 포켓 노트를 뒤적이며 말했다. 그는 들뜬 마음을 애써 아닌 척 하며 말했다. 건물의 단단한 콘크리트 너머 사람들의 움직임 소리가, 그들의 존재감이 뱉어내는 윙윙댐이 아스라이 들렸다. 그녀는 손등을 왼쪽 가슴에 대고 박동을 느껴보았다. 주체할 길 없이 뛰었다. 박한기의 손목을 붙잡고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 했다. 


-쌀 것 같아서요.


-손님들을 기다리게 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죠. 선생님께 배우는 게 많아요.


그를 뒤로하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큰일을 보는 건 쉬웠다. 뒤쪽에서 어떤 고통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치열이 자연 치유되었다는 사실보다 고통이 소멸된 상태에서 과거에 아팠던 기억을 경시한다는 게 더욱 놀라웠다. 그녀는 골반을 향해 빡빡한 스타킹을 올렸다. 한 번도 그쪽이 아픈 적 없었던 것처럼.


파우더 룸 전면을 차지한 거울 앞에 선 그녀는 이틀이 넘도록 거울을 한 번도 안 봤다는 걸 알아차렸다.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볼륨이 낮은 클래식을 들으며 엉킨 머리칼을 정리했다. 거울 속 유정은, 분명 유정이었지만 본래 유정에게서 조금 빗나간 상태였다. 평소보다 입술이 부르텄고 와잠이 푸르렀을 뿐이지만 마음 속 가장 핵심적인 것의 각도가 미세하게 틀어졌다. 유정은 최상급 진주알을 품은 거대한 연체동물이 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눈이 보이지 않는 자가 점자를 읽듯 열 손가락으로 얼굴의 모든 요소를 건드려보았다.


너는 누굴까. 목덜미가 차가워지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온 몸에 생긴 수많은 눈알들이 눈꺼풀을 치켜떴다. 새로 생긴 눈의 시력이 꽤나 좋아서, 유정 내면에서 싹트는 무언가를 제대로 포착 할 수 있었다. 앞으로 정서의 물과 기만의 빛을 조절해 그것을 잘 길러야 했다. 중성적인 웃음이 안온한 화장실 분위기를 갈라놓았다. 찢었다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유정은 한참 뒤에야 그것이 제 웃음소리임을 알았다.


립스틱을 입술의 반절만 칠했을 때 전화가 울렸다. 매끈한 액정에 두서없이 연결된 수십 자리 숫자가 보였다. 유정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배열 방식의 숫자였다. 숫자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여보세요.


-루앙남타 정글에서 다 잃었어. 


로미구나. 라오스의 로미로구나. 


통화선 너머 유정이 가늠할 수 없는 정글의 핵심. 그곳, 수풀에서 나온 로미는 흙바닥에 앉아 들쥐고기를 먹으며 주민들이 화전을 일구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로미는 손에서 나는 흙 비린내를 맡으며 수화기를 쥐었다. 피트는 지난 밤 사쿠라 바에서 놀고 새벽까지 로미와 센슈얼하게 몸을 쓴 탓에 아직 숙소야. 그때 탁발행사 행렬이 다가왔지. 눈동자가 오팔 같은 한 소년에게 자신이 먹던 찰밥을 주었을 때 문득 꽝시 폭포가 떠올랐어. 컬러차트에 없는 색의 빛 선이 흐르는 걸 보았지. 지금 로미의 앞에 흐르는 것은 어제 먹은 까오삐약 면발인가, 물줄기인가. 물의 실타래 사이로 빛이 보였어. 방사형으로 뻗은 빛을 걷어내니 중심이 보였어. 원. 0. 폭포수의 창살을 걷어내고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어. 이마에 눈이 생겼어. 로미는 정글에서 다 잃었어. 그러나 신의 목소리를 얻었어, 옴, 옴, 옴, 옴팔로스. 그녀는 옴팔로스라는 거대한 글자 위에 앉아 세 개의 눈을 떴을 거야.


아니다. 이건 아니다. 유정 역시 피트랑 다를 바 없었다. 전화를 받고난 찰나 동안 조악한 오리엔탈리즘에 취한 전형적인 선진국 동아시아인이 할 법한 생각을 했다. 앞서 언급한 건 유정의 상상이다. 로미가 고백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아이가 말했다. 가자마자 루앙남타 정글 투어를 신청했어. 폭포에 있는 다리를 지나다 가방을 떨어뜨렸……가이드가 사기 쳤어. 아침에 일어나니……모닥불 옆에 피트만 있었어……허니문이 망하면 남은 결혼 생활도 망할 거라고. We fucked up. 멍청한 백인 놈.


아롬은 정글 탐험 여행사 고소, 혼인 철회, 사라진 여권 등 현실에 맞닿은 이야기를 했다. 유정은 립스틱을 온 얼굴과 목에 칠하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대신 입술에 대고 눌렀다. 거울에 붉은 파편이 튀었다. 아롬은 이 마을 저 마을을 전전하다 통신이 가능한 마을에 어제 도착했다고 했다. 피트는 어디 있는지 모른다.


-돈 좀 보내줘.


유정은 듣고만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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